비엔티안 왕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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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원래 [[라오스]]
[[1706년]], 술리냐웡사의 손자에 해당하는 킨 킷사라트와 인타솜 형제가 [[루앙프라방]]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세타티랏 2세는 독립 세력을 제거할만한 힘이 없었고, 독립을 승인하거나 외부에 도움으로 그들을 진압해야 하는 선택에 직면하게 되었다. 결국 세타티랏 2세는 [[아유타야 왕국]]의 산페트 8세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다음해 [[1707년]] [[아유타야]]의 군대가 비엔티안에 도착했다. 그러나 란쌍왕조의 약화를 노리는 아유타야 군대가 비엔티안에서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세타티랏 2세는 란쌍왕국을 루앙 독립 왕조(루앙프라방 왕국)와 비엔티안 왕조의 두 분단된 나라로 갈라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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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앙 지역의 분리 이후, 비엔티안 왕국의 세력권은 루앙프라방을 지지하는 형태로 불만을 표했고, 분열을 목표로 하는 움직임이 각지에서 커졌다. 이 운동은 [[1709년]]에 무앙 나콘의 영주 프라 프로무라사 반란의 진압으로 일단 혼란은 가라앉았지만, 1713에는 [[아유타야 왕국]]의 계략에 의해 [[참파삭]] 지역이 [[참파삭 왕국]]으로 분리 독립되었다.
세타티랏 2세의 사후, 1730년에 왕위를 계승한 옹 분(푼나산) 왕은 이웃 나라인 [[톤부리 왕조]]
[[1773년]] 비엔티안 왕국은 루앙프라방 왕국의 침공을 받지만, 이 때 푼나산은 동맹 관계에 있던 [[
샴는 에메랄드 부처와 사로잡은 수많은 귀족 등을 전리품 얻고, 1780년에 철군했지만 푼나산은
그러나 한편, 비엔티안 왕국은 [[1787년]] [[므앙 푸안]]의 영토를 둘러싸고 [[떠이선 왕조]]([[베트남]])와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 충돌은 [[응에안 성]]의 카이산에 의해 베트남 측에 승리로 돌아갔고, 이후 므앙 푸안는 비엔티안 왕국 영토이면서 베트남 왕조([[떠이선 왕조]]와 [[응우옌 왕조]])의 세력 하에 놓인 매우 불안정한 지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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