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다 하야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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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0월 25일]], 도쿄 올림픽 폐회식 다음날에 사의를 표명, 후임 자민당 총재에 [[사토 에이사쿠]]를 지명했고 같은해 갑작스런 건강상의 이유로 병원에 입원하여 12월에 퇴원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65년]] 8월에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수술을 받은 이후인 [[8월 13일]] [[폐렴]]에 의해 사망했다. 향년 65세.
 
그는 사토 에이사쿠와 함께 요시다파(吉田派)의 대표적 인물로서, 요시다 시게루의 최측근으로 연합국과의 강화, [[냉전]] 하의 [[미국|미]]·[[일본|일]] 관계 구축과 동시에 전후 일본 경제의 재편성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총리전임 취임총리인 후에는기시 노부스케 시절의 주요 정치적 쟁점이었덙 [[미일안보조약]] 개정 문제과 헌법 개정 문제 등으로 격화된 정치적 쟁점에서 한 발짝 물러나, 경무장·경제성장노선을 주요 정책으로 삼아, 10년 안에 국민의 평균소득을 2배로 늘린다는 [[소득배증정책]]을 통한 고도 경제 성장 정책을 추진하였고추진하였다. 기시 내각시절에 격화된 보혁 갈등을 완화시키고, 소위 '정치의 계절'에서 '경제의 계절'로 사회 분위기를 전환하는 등, 현재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 진전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정치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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