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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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1세_김두한.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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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 2003년3월 19일
|확인일자 = }} </ref> [[한국의 군정기]]에는 [[조선공산당]]의 산하인 조선청년전위대 대장으로 있었으나 부친([[김좌진]])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된 후 이를 탈퇴하고 [[우익]]으로 전향하여 [[반탁운동]] 등 좌우대립에서 투쟁하였다대립했다. 그러나 그의 극단적인 활동으로 [[미군정]]에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 [[제1공화국]] 당시 [[1949년]] [[노덕술]] 등 친일파들에 의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및 정부요인 암살 음모 사건|암살표적]]이 되었고되기도 했으며<ref name="공보부"/> , [[6월 17일]]에는 [[국가보안법]] 등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ref name="국가보안법"/>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한 학도의용군 등 전선에 참전했으며 [[노동|노동운동]]에도 투신하여 노동운동가로서도 활동했다. [[대한민국 제3대 국회]] · [[대한민국 제6대 국회]] 등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비판하였다.<ref name="백만불미스터리"/> [[대한민국 제6대 국회|대한민국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 직후 [[한국독립당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고, 한국 비료 주식회사([[삼성]])가 [[사카린]]을 밀수하다 발각된 [[사카린 밀수사건|사카린 밀수사건]]으로 [[대한민국 국회|국회]]에서 [[삼성]] [[이병철]]과 [[제3공화국|정부]]를 비판하며 발언 도중 장관, [[국무위원]]들에게 [[국회오물투척사건|오물]]을 투척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한 학도의용군 등 전선에 참전했으며 [[노동|노동운동]]에도 투신하여 노동운동가로서도 활동했다. [[대한민국 제3대 국회]] · [[대한민국 제6대 국회]] 등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비판하며 반[[독재]] 등 [[민주화 운동]]에도 투쟁했다.
 
[[대한민국 제6대 국회|대한민국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 직후 [[한국독립당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고, 한국 비료 주식회사([[삼성]])가 [[사카린]]을 밀수하다 발각된 [[사카린 밀수사건|사카린 밀수사건]]으로 [[대한민국 국회|국회]]에서 [[삼성]] [[이병철]]과 [[제3공화국|정부]]를 비판하며 발언 도중 장관, [[국무위원]]들에게 [[국회오물투척사건|오물]]을 투척하였다.
[[대한민국 제7대 총선]] [[경기도]] [[수원]] [[신민당]] 후보로 선거 유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깃불 관련 발언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찬양했다는 혐의로 [[반공법]]으로 옥고를 치렀고. 이후에는 [[10월 유신|유신]] 벽보를 뜯는 등 비판하다 [[1972년]] [[11월 19일]] 사람을 만나러 나간다며 나간 뒤 어딘가에서 쓰러져 [[혼수상태|의식불명]] 상태로 가망 없는 퇴원 직후 [[11월 21일]] [[서울 성북구]] 정릉동 무허가 자택에서 오전 9시 5분에 사망했다.<ref>길거리에서 쓰러졌는지 다른 곳에서 쓰러져 서울 센추럴 호텔에 옮겨졌는지 서울 센추럴 호텔에서 쓰러졌는지 병원으로 누군가에 의해 옮겨졌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ref><ref name="백만불미스터리">{{뉴스 인용|url=http://wizard2.sbs.co.kr/vobos/wizard2/resource/template/contents/06_review_image_detail.jsp?vProgId=1000292&vVodId=V0000247952&vMenuId=1004681&rpage=6&cpage=14&vVodCnt1=00015&vVodCnt2=00 |제목= 백만불 미스터리 |발행일자= 2003년 9월 1일 |출판사= [[SBS]] |확인일자= }}</ref> 대변에도 능하여 연설 등에서 지지를 받기도 했다.<ref name="백만불미스터리"/> [[본관]]은 [[안동김씨|안동]], [[김상용 (1561년)|김상용]](金尙容)의 12대손이며 [[호 (이름)|호]]는 [[의송]](義松), [[별칭]]으로는 잇폰({{llang|ja|いっぽ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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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후 ===
[[1945년]] 해방 이후 김두한은 [[건국준비위원회]], 등에[[건국치안대]] 참여하여등에서 일본군활동했다고 무기고를 점령하거나 치안에 힘을 기울이며 활약하였다한다. 그러나 곧 [[한국의 군정기]]로 [[건국준비위원회]] 등 단체들이 해체되자 죽마고우이기도 한 [[프롤레타리아트]] [[공산주의]]이던 [[정진영 (사회주의 운동가)|정진영]], 만담가 [[신불출]], [[박헌영]]의 인연으로 [[조선 공산당]]의 전위대장을 맡았으며 [[인민군]] 남조선 사령관 ([[소장 (군인 계급)|소장]])을 임명하는 제의도 있었다고 한다. [[남로당]] 총책이었던 [[박갑동]]에 의하면 조선공산당 전위대장으로 있을 당시 민족진영에서는 [[조선공산당]]에 대해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ref name="백의사">{{뉴스 인용|url= |제목= 비밀결사 - 백의사 |발행일자= 2002년 1월 20일 |출판사= [[MBC]] |확인일자= }}</ref> 이후 [[이규갑]], [[장덕수]] 등에게 [[김좌진]]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된 김두한은 [[조선 공산당]]을 탈퇴 및 [[우익]]으로 전향하였다.<ref> {{뉴스 인용
|제목 = 제25화 해방후 대한민청 모체에 대해
|url = 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0163&r_serial=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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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 =
|작성일자 = 1969년 12월 6일
|확인일자 = }} </ref> [[남로당]] 총책이었던 [[박갑동]]에 의하면 [[미군정]]과 [[경찰]]에 잡히면 오히려 안심했다며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ref name="백의사"/> 김두한은 좌우대립 과정에서 김두한은 5회 피습당했다고 한다. 또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훗날 [[반민특위]]에 체포대상이었던 [[박흥식 (기업인)|박흥식]] 등 [[친일파]] 자본가들 집에 습격하기도 했다고 하며 1원도 사사로운 곳에 쓰지 않았다는 근거로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자신의 집을 [[저당]]과 [[이승만]]의 친필 휘호를 보여주며 [[영수증]]을 썼다고 한다.<ref> {{뉴스 인용
|제목 = 제37화 정치자금 에피소드
 
|url = 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0166&r_serial=01
김두한은 좌우대립 과정에서 5회 피습당했다고 하며 이후 계속해서 좌우대립에서 우익의 선봉장으로서 활약하였으며 청년단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훗날 [[반민특위]]에 체포대상이었던 [[박흥식 (기업인)|박흥식]] 등 [[친일파]] 자본가들 집에 습격하기도 했다고 하며 1원도 사사로운 곳에 쓰지 않았다는 근거로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자신의 집을 [[저당]]과 [[이승만]]의 친필 휘호를 보여주며 [[영수증]]을 썼다고 한다.
|출판사 = [[동아일보동아방송]]
|저자 = 노변야화
|쪽 =
|작성일자 = 1949년1969년 09월11월 10일29일
|확인일자 = }} </ref>
 
[[1947년]] [[대한민청]] 사건 등으로 [[미군정]] 의해 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3심 판관이 사퇴제출하는 등 재판 과정에서도 좌우간에 대립이 극심하였고, [[1948년]] [[3월 21일]] [[김구]]는 "근일에 김두한 군의 사건을 보아도 우리가 얻는 바 교훈이 많다. 김 군이 자기범행에 대해서 법적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범행이 애국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위대한 애국자 김좌진 장군의 영사(令嗣)라는 점에서 보면,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그토록 열렬하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ref> {{뉴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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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공화국과 한국 전쟁 ===
[[1948년]] [[대한청년단]]의 감찰국장 겸 건설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후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노동운동가로서도 활동했으며 이후 [[이승만 정부]]에 의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및 정부요인 암살 음모 사건|암살표적]], [[김구]]의 암살 시기인 [[1949년]] [[6월 17일]] [[국가보안법]] 등으로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ref name="국가보안법">{{뉴스 인용|url=|제목= 金斗漢 大韓靑年團 건설국장,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서울지검에 송청 |발행일자= 1949년 9월 10일 |출판사= [[SBS]] |확인일자= }}</ref><ref name="김구">{{뉴스 인용|url=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0173&r_serial=03 |제목= 제67화 백범 김구선생 암살에 관계됨 |발행일자= 1949년 09월 10일|출판사= [[동아방송]] |확인일자= }}</ref>
|제목 = 金斗漢 大韓靑年團 건설국장,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서울지검에 송청
|url =
|출판사 = 한성일보
|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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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 1949년 09월 10일
|확인일자 = }} </ref><ref name="김구">{{뉴스 인용|url=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0173&r_serial=03 |제목= 제67화 백범 김구선생 암살에 관계됨 |발행일자= 1949년 09월 10일|출판사= [[동아방송]] |확인일자= }}</ref>
 
[[한국전쟁]]이 나자 김두한은 과거 별동대의 대원으로 추정되는 4명에게 극적으로 배를 구해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도움을 준 4명은 한강을 건너 뒤 사라졌다고 하며 누군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ref name="김구"/> 김웅수 장군은 회고록에서 "한강 방어선에서의 기억이다. 30일경 김두한 씨의 내방을 받았다. 자기 동료에게 총기를 주어 일선 배치를 요구하여 그의 애국심에 감탄하였다." 고 회고하였다.<ref name="삼통사">{{뉴스 인용|url=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62700329205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6-27&officeId=00032&pageNo=5&printNo=10690&publishType=00020 |제목= 6.25를 回想(회상)한다 (5) 三統士(삼통사)는 지금 어디에… |발행일자= 1980년 6월 27일 |출판사= [[경향신문]] |확인일자= }}</ref><ref name="김웅수">{{뉴스 인용|url= http://isan.tistory.com/85?srchid=BR1http%3A%2F%2Fisan.tistory.com%2F85 |제목= 4) 맥아더 장군의 일선 시찰과 중공군 소속 북한 의용군-김웅수장군회고록 |발행일자= |출판사= |확인일자= }}</ref> 이후 [[인민군]]과 전투를 벌었다고 한다.<ref> {{뉴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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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 =
|작성일자 = 2002년 10월 9일
|확인일자 = }} </ref> 그러나 김동회가 김두한과 동지라는 확인하는 자료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반대로 김동회가 말한 내용에 대해 틀린 점이 있기도 하는데, 김동회는 1946년에 김두한과 같이 아편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고 말하지만, 김두한의 사형선고는 1946년 아편사건이 아닌 [[정진영 (사회주의 운동가)|정진영]] 등의 살해사건인 1947년에 이른바 대한민청 사건이며 당시 대한민청 사건 보도기사 등 자료에는 김동회란 이름은 없다.</ref><ref name="공보부">{{뉴스 인용|url= |제목= 공보부, 군률재판에서 김두한에 사형언도 발표 |발행일자= 1948년 3월 16일 |출판사= [[동아일보]] |확인일자= }}</ref>
|제목 = 공보부, 군률재판에서 김두한에 사형언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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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 [[동아일보]]
|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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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 1948년 03월 16일
|확인일자 = }} </ref>
 
김동회는 [[드라마]] 《[[야인시대]]》에 평양박치기는 [[이성순|시라소니]]이고 [[선우영빈|하야시]]([[선우영빈]])가 일본인으로 묘사하고 김영태가 해방 후 만난 인물이라고 말하지만 시라소니가 [[이성순]]의 별호이며<ref>[http://www.sirasoni.org/m1/s1.php 시라소니]</ref> [[선우영빈|하야시]]([[선우영빈]])를 일본인으로 묘사하지 않았으며 김영태는 해방 전인 1940년 초이다.<ref> {{뉴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