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 아르슬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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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정보
|이름 = 알프 아르슬란
|그림 = Alp-arslan.jpg
|그림 크기 = 207px
|설명 = 알프 아르슬란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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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9년, 그는 호라산 총독이였던 아버지 [[차그리 베그]]의 지위를 이어받았다. 그의 숙부 [[토그릴 술탄]]이 죽자 알프 아르슬란의 형제 술레이만이 그의 지위를 계승했다. 알프 아르슬란과 그의 숙부 [[쿠탈미쉬]]는 각각 자신이 토그릴의 지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064년 4월 27일, 알프 아르슬란은 쿠탈미쉬에게 패배를 안겨주고 대 셀주크의 술탄이 되었다. 그의 페르시아 술탄국은 [[아무다리야 강]]에서 [[티그리스 강]]에 이르는 영토를 지배했다.
그의 제국을 더욱 강하게 하는 동시에 제국 내의 파벌들을 제어하기 위해 그는 페르시아인 재상 [[니잠
===비잔티움과의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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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누스 4세 황제는 생포되어 알프 아르슬란 앞으로 끌려갔다. 술탄은 황제에게 친절한 태도를 보이며 평화 조약을 맺을 것을 제안했고, 황제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술탄은 황제에게 근위병과 보물들을 쥐어졌다. 아래의 유명한 대화는 황제가 술탄의 포로가 된 뒤에 일어난 일이다.
{{인용문|''알프 아르슬란'': 만약 우리의 처지가 반대라면 그대는 어찌하겠소? 내가 그대의 포로가 되었다면 말이오.<br />''로마누스'': 아마 죽이거나 콘스탄티노폴리스 거리를 끌고 다녔을거요.<br />''알프 아르슬란'': 나의 처벌은 그보다 더 잔인하다오. 그대를 용서하지. 그대의 나라로 돌아가시오.}}
알프 아르슬란의 승리는 근동의 힘의 균형을 [[순니파]] 무슬림과 셀주크 제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돌려났다. 비록 비잔티움 제국이 4세기 더 살아남았고, 십자군이 때때로 승리를 거두었다고는 하지만, 만지케르트는 [[아나톨리아]]에 대한 튀르크 정복의 시작을 의미했다. 대개의 역사가들은, [[에드워드 기번]]도 포함된다, 만지케르트의 대패가 로마 제국의 멸망을 알리는 서곡이라 기록했다. 튀르크 기병들이 아나톨리아에 진입함으로 제국에 끝없는 인력을 제공해준 테마들이 사라졌다.
===내치===
알프 아르슬란은 군사적 업무 외에는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내정은 그의 유능한 재상 [[니잠
시인 [[사아디 쉬라지]]에 의하면, ''아르슬란의 성채들은 알완드만큼이나 당당하게 솟아있다. 성벽은 성을 든든하게 지켜주며, 그 안의 길들은 마치 신부 목의 진주와 같이 꼬여있다. 언제인가 아르슬란이 어떤 교양있는 여행자에게 물었다. “오래도록 떠돌아 다니며 이와 같이 든든한 성을 본적이 있는가?” “본적이 있습니다.” 여행자가 답했다. “하지만 이 성은 그리 든든하지 않습니다. 확실히 이렇게 든든한 성들을 여러 개 가진 군주는 폐하가 유일합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돌아가셔도 그럴까요? 어떤 왕도 죽어서 성을 지배하고, 원하는 바를 이루지는 못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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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자는 세상이 가짜 보석이라는 것을 알고, 한 순간에 사라진다는 것을 안다.'' (그 성은 후일 [[훌라구]]가 이끈 몽골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쉴레이만 이븐 쿠탈미쉬]]는 아르슬란의 경쟁자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서부의 통치자로 임명받았고, 아나톨리아 침공에서 큰 활약을 했다. 아르슬란이 그를 기용한 이유는 이븐
===죽음===
만지케르트 이후 알프 아르슬란은 아시아의 서쪽 대부분을 정복했다. 이후 그는 조상들의 땅인 [[투르키스탄]]을 정복하리라 마음먹었다. 엄청난 대군이 그와 함께 아무 다리야 강까지 진군했다. 그는 병사들이 강을 안전하게 건너려면 몇몇 성채들의 복종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런데 그런 성채 중 하나가 그의 군대에 엄청나게 저항했다. 그 성채의 주인은 유수프
''''오, 알프 아르슬란의 위엄을 보았는가. 보라! 이제 그는 검은 흙 속에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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