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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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ima Guang.jpg|thumb|200px|사마온공(司馬溫公). <만소당죽장서부>(晩笑堂竹莊書傳)에서]]
'''사마광'''(司馬光; [[1019년]]<ref>천희(天禧) 3년</ref> - [[1086년]]<ref>원우원년(元祐元年)</ref>)은 중국 [[북송]] 대의 유학자이자 역사가, 정치가이다. 자(字)는 군실(君實). 섬주 하현(陝州 夏縣;[[산시 성 (산서성)|산시 성]]) 사람으로 호(號)는 우수(迂叟). 또는 속수선생(涑水先生)이라고 불렸다. 시호는 문정(文正). 온국공(溫國公)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선조는 [[서진]](西晋)의 고조(高祖) 선제(宣帝) [[사마의]](司馬懿)의 동생 [[사마부]](司馬孚)라고 한다. [[자치통감]]의 저자로서 유명하다. 신법(新法)과 구법(舊法)의 다툼에서 구법파의 영수로서 [[왕안석]](王安石)과 논쟁을 벌였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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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법당과의 갈등 ===
{{참고|신법당|구법당|왕안석}}
[[1067년]]<ref>치평(治平) 4년</ref> [[북송 신종]](神宗)이 즉위하고 [[왕안석]]을 기용하여 신법을 단행했다. 당시 한림학사(翰林学士)였던 사마광은 당초 개혁에는 찬성이었다. 그러나 [[왕안석]]이 관료의 기득권을 침범하고 정치의 일신을 도모하자, 곧 반대 입장으로 바꾸고 추밀원을 근거지로 한 [[왕안석]] 반대파(이른바 구법파)와 연계하여 강행하는 신법 반대를 주장했다. 사마광은 [[왕안석]]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신법의 철회를 요구했기 때문에, 마침내 조정에서 퇴출되어 부도(副都) 낙양에[[낙양]](洛陽)에 사실상의 은거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그 이후 사마광은 구법파 동조자와 함께 신법의 반대를 끝까지 주장하게 된다.
 
이렇게 조정의 의향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던 사마광이었지만 선대 [[북송 영종|영종]](英宗)이후 신종에게도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다. 특히 <자치통감>의 편찬을 생각한 후에는 영종에게서 특별히 편의를 제공받으면서 그 완성을 기대하게 되었다. 또 신종의 신법에 반대하여 수도에서 쫓겨난 사마광이었지만 역으로 신종에게서 <자치통감>을 완성하라는 명을 받았다. 즉 이 책은 사마광의 낙양 은거때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