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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령 공포로 춘천·원주 지방에서 의병이 봉기함에 따라 서울을 지키는 군대가 대부분 지방에 내려가고,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으로 내각이 무너지자 그는 일본으로 망명했다.<ref>유길준 역시 명성황후 암살의 한국인 협력자로 인식되고 있었고, 그를 암살할 자객들이 출몰하기도 했다.</ref> 그는 가족들을 피신시킨 뒤 [[1896년]] [[2월]] 비밀리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 갑오, 을미경장기 활동과 유배활동 ====
{{본문|갑오개혁|을미개혁|대한제국}}
[[1894년]] [[갑오개혁]] 때 외무참의 등을 지내고, [[1895년]] [[김홍집 (조선의 문신)|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내무부|내무]][[협판]]을 역임하였다. 이 무렵 그의 부탁을 받은 [[박영효]]는 [[서재필]]을 설득하여 귀국하게 한다. 유길준 또한 [[서재필]]를 초빙형식으로 귀국시키는데 노력하였다.<ref name="omay0804">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73048</ref>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갑신정변이 민중의 지지가 결여되었기에 실패했던 교훈을 되새긴 유길준은 민중을 계몽하는 사업으로 신문 창간이 절박했다. 갑오경장이 개화파 내각의 주도로 제도 개혁을 하면서 일본측의 한성신보에 대항할 신문을 만들 한국인을 물색했는데, 그가 서재필이었다.<ref name="omay0804"/>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유길준은 유길준 대로 개혁과 민중을 계몽하는 사업으로 신문 창간이 절박했고<ref name="omay0804"/>, [[일본]]은 일본 대로 1895년 무렵부터 조선에 신문 창간을 후원한다는 명목으로 신문 개설을 권고하였고, 이에 내부대신 유길준은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의사 생활을 하던 필립 제이슨을 초빙하기에 이르렀다<ref name="omay0804"/>는 것이다.
 
[[1896년]] 내무부 대신에 올랐으나, 그해 [[2월]]의 [[아관파천]]으로 내각이 해산되자 일본에 망명했다.

==== 일본 망명과 유배 ====
일본 망명 중 그는[[독립신문]] 1897년 10월 16일자<ref name="pre1"/>에 실린 [[미국]]을 소개하는 기사를 접한다.
{{인용문|이 나라에서는 의리로 주장을 삼고 정치상과 권리상에 모든 일들을 천리와 인정에 합당하게 만든 풍속과 사업이 많은 고로 천복을 받아 지금 이 나라가 부하기로 세계에 제일이요, 화평한 복을 누리기로 세계에 제일이라.<ref name="pr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