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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도자기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원했던 이유중에는 당시 일본에서는 자체적으로 [[고령토]]나 백토의 산지를 찾지 못하고 있었으며 수요는 극에 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은 비교적 늦게 도자기가 발달했는데, 정작 다도는 융성하고 있었다. 게다가 17세기에 [[도자기]]는 엄청난 가치가 있었다. 일본의 당대 기록에 따르면 하급 무사의 토지와 녹봉 전체가 다완 하나의 가치와 맞먹었을 정도였다. <ref> 따라서 일본의[[다도]] 예절중에 다도 도구를 감상하는 시간이 있는 것은 당대 다도구들이 모두 예술품이고 엄청난 고가의 제품들이었기 때문이기에 어찌보면 당연하달 수 있겠다.</ref> [[오다 노부나가]]시절에 일본과 교류하기 시작한 [[네덜란드]] 상인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는데 이 당시로부터 이후 백년간 유럽에서는 고령토를 생산하지 못 했고 중국은 이를 이용해서 막대한 수출액을 챙기고 있었으며, 교역상대역시 중국측에서 고를 수 있었다. 중국의 주요 교역국이 되지 못 했던 네덜란드는 대체품을 원하고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도공들에게 중국에서 들여온 고령토를 쥐어주고 생산을 하도록 시키게 된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의 도공들을 가족까지 모두 잡아가서 도자기를 만들도록 시킨다. 일본에 건너간 조선 도공들은 규슈로 이주해 도공 마을에 한데 묶여 감시를 받으면서 막부가 중국으로부터 수입했던 고령토를 이용해서 초기 [[일본 도자기]]를 만들었고 [[이삼평]]과 [[심수관]]등의 이주 도공들은 규슈에서 고령토를 찾아낸 이후 일본의 도자기는 급격하게 발전하게 되었다. 이들의 상품은 네덜란드에 고가에 판매되어 막부에 막대한 수익을 남기게 되었다. 막부는 특히 이도 다완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도다완으로 정부 인증을 붙여 고가에 판매하게 되었다. 일본의 판화를 세계에 알렸던 1867년 [[파리만국박람회]]에 일본이 도자기를 출품했던 것을 보면, 당대의 일본이 무엇으로 유럽에 알려져 있었는지를 명확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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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유로 귀화한 많은 도공 일가는 일본에서 무사의 작위를 받게 되어서 비교적 윤택한 삶을 누리게 되지만 이와는 별도로 차별대우와 감시는 여전해서, 메이지 시대 말까지 조선 도공들의 후손들은 자신의 영지이자 마을을 떠날 수가 없었다고 하며, 이중 귀화하지 않은 교포의 경우 도공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현재 14대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심수관요]]는 일본의 대표적인 [[이도다완]]이며 현재 한일 민간 외교사절이자 주한 가고시마 대사관 역할을 겸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귀화한 많은 도공 일가는 일본에서 무사의 작위를 받게 되어서 비교적 윤택한 삶을 누리게 되지만 이와는 별도로 차별대우와 감시는 여전해서, 메이지 시대 말까지 조선 도공들의 후손들은 자신의 영지이자 마을을 떠날 수가 없었다고 하며, 이중 귀화하지 않은 교포의 경우 도공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현재 14대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심수관요]]는 일본의 대표적인 [[이도다완]]이며 현재 한일 민간 외교사절이자 주한 가고시마 대사관 역할을 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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