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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File:Prieur - Arrestation de Louis Capet (Detail).png|thumb|440px|루이 까페의 체포, (1804년 작)]]
[[1791년]] [[6월 20일]] (월요일) 자정, 루이 16세와 왕비, 왕자와 공주는 각각 변장을 하고 따로 [[튈르리 궁전을궁전]]을 빠져 나왔다. 0시에 출발 예정이었지만, 국왕을 감시하고 있었던 라파예트가 예정에 없이 나갔기 때문에 결국 국왕이 궁전을 나온 것은 1시가 지나서 였다. 일행은 러시아 귀족 코르푸 후작 부인 행세를 했고, 근위대인 마르덴의 안내로 이두마차를 타고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궁궐을 나갔다. 왕자와 공주는 무도회 간다고 말했기 때문에 놀란 것이다. 한편, 호위를 맡은 쇼와즈르와 고그라는 이미 10시간 전에 엽기병을 데리고 파리를 나와 있었다.
 
여권에 적힌 일행의 인원수는 6명이었고, 코르푸 후작 부인 역에는 왕자들의 보모였던 투루제르 공작 부인이 맡았고, 그 아이는 왕세자 루이 샤를과 공주 [[프랑스의 마리 테레즈|마리 테레즈]] 역이었다. 여행 시종으로 왕의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루이 16세는 듀란이라는 하인을 맡았고, 마리 앙트와네트는 마담 호크라는 시녀로 분장하고 있었다. 마차의 마부는 변장한 페르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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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인 [[6월 21일]] 오전 6시에 시녀들이 국왕 일가의 없어진 것을 알렸기 때문에, 그들은 4시간의 유예도 없었다. 긴급한 것을 깨달은 라파예트는 국민 의회와 시청에 대포를 세발 쏘게 하고 경보를 발령하여, 파리의 경계 태세를 강화했다. 재빨리 수색대가 조직되고, 분노한 민중은 즉시 궁전으로 들어와 루이 16세의 흉상을 부수고, 퇴위를 요구하는 등 분노를 쏟아냈다. 대포 소리는 도피 중인 마차 안의 국왕의 ​​귀에도 들렸다 때문에, 그는 몇 통 유서를 썼다가, 잠시 후에 추격대가 오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자 안도를 하면서 빠져 나갔다. 파리 교외의 본디까지 온 루이 16세는 페르센에게 더 이상 참석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왕비와 너무 가까운 외국인을 데려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왕비에게 작별하고 떠났다.
 
그 무렵, 스와즈루는 40명의 엽기병을 이끌고 샤론 마을 근처의 퐁 드 솔 베일 다리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국왕의 마차는 도착하지 않았다. 주민들의 눈에 노출되자, 점점 불안해진 스와즈루는 부대를 분산시켜 가도에서 숨겼다. 국왕의 마차는 은식기와 와인 8통, 요리 벽난로 2개 등 필요한 제품을 잔뜩 실어 느린 속도로 가고 있었다. 국왕 일행이 샤론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였다. 변장한 국왕 일행은 방심하고 있었고, 이곳에서 우아하게 식사를 하고, 화려한 마차와 짐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유유히 사라졌다. 그러나 곧 시내에 왕실 인물들이 통과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퐁 드 솔 베일에서 국왕은 첫 호위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스와즈루스와즈루의 어리석은 판단에 따라판단으로 길이 엇갈렸다. 다음 [[:w:Sainte-Menehould|생트므누]] 마을에서도 다른 용기병 부대가 기다리기로 했기 때문에 국왕은 2시간 더 가서 그곳에서 만나기를 기대했다.
 
[[File:Arrest of Louis XVI and his Family, Varennes, 1791.jpg|250px|thumb|left|잡혀서 비탄에 빠진 앙트와네트 왕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