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양위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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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의 전말 ==
=== 원인 ===
[[파일:Itô Hirobumi.jpg|썸네일|160px|left|[[조선통감부|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러시아]]의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니콜라이 2세]]에게 헤이그 밀사 편으로 밀서를 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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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조상들의 신주까지 불 속에서 사라졌다. 양자를 잘못 들인 탓으로 우봉 이씨 조상들의 위패가 수난을 당한 것이다. '''이완용 자신이 조상 신주가 불타버린 것이 일생 중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이 사건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ref name="yun260"/> 을사조약 전까지만 해도 민중들로부터 가장 욕을 많이 얻어먹은 것은 주무 대신이었던 박제순이었다. 이완용은 박제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공격과 비난의 중심에서 다소 벗어나 있었다. 그런데 고종 양위를 계기로 이완용은 완전히 매국노의 대명사로서 민중들의 저주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ref name="yun260"/>
 
집은 불타고 이완용의 가족들은 '매국노의 일족들을 잡아 죽여라'는 군중의 함성에 쫓겨 남산 아래 왜성구락부로 몸을 피했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이완용은 [[덕수궁]]에서 총리대신으로서 그리고 궁내부대신 임시 서리로서 [[순종]]의 즉위식을 주관했다.<ref name="yun260"/> 이완용이 순종 즉위식을 주관한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반이완용 데모와 이완용 화형식은 전국 각지에서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순종 즉위식이 끝난 뒤에 덕수궁으로 몰려와 이완용을 죽여라 라고 외치는 함성을 듣고 그는 당황한다. 기자들과 관료들이 전국 각지에서 그가 고종 양위를 주관하고 순종 즉위식을 주관했으며, 고종이 그의 음모에 의해 퇴위당한 것으로 소문이 나 있음을 알려왔다.
 
식이 끝나자 [[이토]]는 이완용을 재촉해 자신의 마차에 태우고 함께 통감 관저로 향했다.<ref name="yun261">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61페이지</ref>
 
통감 관저에는 이미 이완용의 가족들이 일본 순사들에 의해 구출되어 보호를 받고 있었다. 오갈데가 없어진 이완용과 그의 가족들은 이토의 주선으로 이날부터 왜성구락부에 머물기 시작했다.<ref name="yun261"/> 이완용의 부인 조씨는 왜성구락부에서 거처하기 시작한 첫 1주일 동안은 생활비도 모두 이토가 대주었다고 회고했다. 이완용은 이곳에서 두 달 가량 머물다 9월에 식구들을 데리고 장교에 있는 그의 서형 [[이윤용]]의 집으로 들어가 함께 살았다.<ref name="yun261"/>
 
[[1908년]] [[1월]]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이 이완용의 딱한 소식을 듣고 집을 마련한다.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이 '집도 없이 형에게 얹혀 사는 [[총리]]대신 이완용의 딱한 사정<ref name="yun261"/>'을 듣고 저동에 있는 남녕위 궁을 하사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집을 장만하게 되었다.<ref name="yun261"/><ref>이완용은 이때 자신의 집을 처음 마련한 것이었다.</ref> 고종은 자신에게 양위를 사실상 강요한 이완용을 괘씸하게 생각했을 법도 한데 오히려 그에게 황실 소유의 저택까지 하사한 것이다. 일반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황실과 이완용은 계속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ref name="yun261"/> 이완용을 고종 퇴위의 책임자로 생각하는 국민들의 비난은 계속되었고, 지식인들은 당황해하였다.
 
==== 박영효 탄핵 ====
[[Image:Parkyh-1910.jpg|thumb|160px|[[박영효]]]]
 
[[일본]]군의 출동으로 시위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이완용과 법부대신 조중응은 '궁내부 대신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은 박영효를 처벌하라'는 상소를 새 황제 순종에게 올렸다.<ref name="yun261"/>
 
이완용은 상소문에서 '이번에 황제의 위를 물려준 것은 태황제의 순수한 심정에서 나온 것이며 종묘사직이 억만년토록 공고하게 될 기초가 여기에 있으므로 경사롭게 여기고 기뻐하지 않은 신하와 백성이 없다 그런데 박영효가 그 직책을 회피했으니 그 죄를 물어야 한다'고 사태를 완전히 왜곡하는 주장을 했다.<ref name="yun261"/>
 
순종은 물론 그대로 허락했다. 순종이 한일병합 때까지 3년여 황제로 재위한 동안 내각에서 올린 상소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수정 또는 보완을 지시한 경우는 거의 없다. 그저 '올린 대로 처리하라'는 것이 한결 같은답변이었다. 순종은 그것을 거부하거나 보완을 지사할만한 지적 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저 황제의 자리에 앉아 있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토가 기를 쓰고 그를 황제로 올린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ref name="yun262">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62페이지</ref>
 
이완용의 상소에 따라 [[박영효]]는 역시 황제 대리 의식 집행을 거부한 시종원경 [[이도재]], 전 [[홍문관]] 학사 [[남정철]]과 함꼐 법부에 구속되었다.<ref name="yun262"/> 이때 감옥에 갇힌 박영효가 배탈이 나 고생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토가 그에게 약을 보냈으나 박영효는 한국에도 약이 있다면서 되돌려 보냈다. 박영효는 [[경무청]]에서 심문을 하자 "총리대신 이완용 씨를 역적이라고 말했을 뿐 죄지은 것이 없다"고 호통을 쳤지만 결국 유배형을 받고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ref name="yun262"/> 그러나 황제는 유배 중인 [[박영효]]는 [[제주도]] 밖으로 이동할 권한을 부여한다.<ref>박영효는 도성에 출입금지령으로 형이 감량되고, [[1910년]] [[마산]]에서 [[한일 합방]] 소식을 접한다.</ref>
 
==== 고종 퇴위 이후 ====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자 그는 사회적으로 황제를 퇴위시킨 망국노, 역적이라는 질타를 당했고 반이완용 시위, 이완용 화형식이 곳곳에서 거행되었다. [[1907년]] [[12월]] 보국숭록대부로 승진했다. 이완용은 1909년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가하러 [[명동성당]]에 갔을 때 기다리던 [[이재명 (1890년)|이재명]]<ref>이재명은 당시 대한제국의 현역 군인이었다.</ref>의 칼에 찔렸다. 그러나 우연히 인력거꾼 박원문이 그의 앞을 막아서는 바람에 목숨을 건진다. 박원문은 대신 부상을 당해 절명하고 만다. 이재명 열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그 자리에서 재차 이완용을 공격했지만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 하고 체포된다. 이재명 열사는 합병 후 박원문을 살해한 죄로 1910년 9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반면 이완용은 어깨, 허리, 복부 등 세 곳을 칼로 찔리는 큰 부상을 당하였고, 왼쪽 폐에 찔려 관통당하는 치명상을 당한다. 이때 상처는 만년에 [[해수병]]으로 고생하다 끝내 천식과 폐렴으로 사망하는 원인이 된다. 이완용은 암살될 뻔한 위기를 맞았으나 약 2개월간의 입원 치료 끝에 회복되었다.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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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
* [[조선통감부]]
* [[을사 보호 조약]]
*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
* [[헤이그 특사 사건]]
* [[이토 히로부미]]
* [[이완용]]
* [[송병준]]
* [[이상설]]
* [[이준]]
* [[대한제국 고종]]
* [[대한제국 순종]]
 
[[분류:대한제국]]
[[분류:1907년]]
[[분류:대한제국의 황제]]
[[분류:1907년 일본]]
[[분류:한일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