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0일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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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도가 공공연하게 왕정을 전복할 계획”이라고 압박하는 상황에 대한 위기감은 7월 10일, 푀양파를 총사퇴에 이르게 했다. 입헌군주제를 지키는 마지막 시도는 군 사령관으로 복귀한 라파예트에게 맡겨졌다. 그는 메르시 대사를 통해 자코뱅파를 해산시키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 진군할 용의가 있다”는 말로 오스트리아에 군사 행동 중단을 요구했으며, 국왕에게 콩피에뉴 탈출을 권했다. 여기서 그는 군대와 기다릴 예정이었지만, 국왕의 재 도주 계획은 7월 12일부터 15일로 연기되어 결국 중단되었다. 루이 16세는 바렌느 사건의 실패를 떠올렸고, 신뢰할만한 스위스 용병 부대의 보호 아래에서 나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마리 앙투아네트가 여러 왕국의 동맹군에게 성명을 내서 압박하여 [[7월 25일]], 브룬스윅 선언을 발표하도록 했지만, 이것은 오히려 무장 봉기를 자극하는 역효과가 났다.
 
프랑스 혁명에서 특징적인 것이지만, 봉기는 존재하지 않는 위협에 대한 자기 방어 행위였다. 8월 10일 사건은 누군가가 시종일관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었고, 7월 마지막 주에 파리에서 비정상적으로 고조된 시위 행동은 폭발의 절정을 맞이한 것에 불과했다. 의회의 입헌군주파와 궁정의 왕당파에 대해 민중이 일어서지 않으면 짓밟힐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지롱드파는 봉기도, 왕권의 상실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억제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8월이 되면서 왕정 타도야말로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견해가 파리 전체에 대세가 되어갔다.
 
==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