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0일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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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제 불안([[아시냐]]의 폭락과 [[설탕]] 가격의 상승)의 영향은 시민의 생활을 강타했다. 파리 상퀼로트들은 생활 개선을 요구하면서 다시 결집했다. 이 흐름은 이미 좌익 이데올로기를 동반하고 있었고, 생활에 직결되는 절실한 요구는 점차 탁류처럼 강하고 격렬해 졌다. 운동을 지원하는 수동적 시민은 투표권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정치적인 어필은 무장 행진 등 보다 직접적인 시위 행동으로 나타났는데, 능동적 시민 중에도 이에 동조하는 사람이 나타나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생 탄트와누 성 밖의 양조업자인 산테이르 등과 같은 사람들이 각 지역의 민병대를 조직하여 혁명은 폭력적인 양상으로 바뀌었다. 급진화 되는 그들의 요구에 정치인들은 따라가기만 할 뿐 주도하지 못했고, 공화제 수립 요구는 날로 높아졌다.
 
이런 가운데 [[1792년]] [[6월 20일]] [[상 퀼로트]]의 시위 행동 사건이 일어났다. 무장한 시민들이 국왕이 살고 있는 튈르리 궁전에까지 침범한 사건은 거부권을 남발하는 국왕에 대한 압력으로 지롱드파가 묵인했다는묵인한 측면도점도 있지만, 무장 봉기가 빨리바로 일어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던 위험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왕정 폐지를 처음으로 꺼낸 것은 지롱드파였지만 이미 사태는 그들의 예상을 웃도는 속도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폭도가 공공연하게 왕정을 전복할 계획”이라고 압박하는 상황에 대한 위기감은 7월 10일, 푀양파를 총사퇴에 이르게 했다. 입헌군주제를 지키는 마지막 시도는 군 사령관으로 복귀한 라파예트에게 맡겨졌다. 그는 메르시 대사를 통해 자코뱅파를 해산시키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 진군할 용의가 있다”는 말로 오스트리아에 군사 행동 중단을 요구했으며, 국왕에게 콩피에뉴 탈출을 권했다. 여기서 그는 군대와 기다릴 예정이었지만, 국왕의 재 도주 계획은 7월 12일부터 15일로 연기되어 결국 중단되었다. 루이 16세는 바렌느 사건의 실패를 떠올렸고, 신뢰할만한 스위스 용병 부대의 보호 아래에서 나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마리 앙투아네트가 여러 왕국의 동맹군에게 성명을 내서 압박하여 [[7월 25일]], 브룬스윅 선언을 발표하도록 했지만, 이것은 오히려 무장 봉기를 자극하는 역효과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