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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9년]] 발생한 [[정여립의 옥사]]로 [[동인]] 당내에서는 [[정철]]을 사형시키자는 강경파와 사형은 과하다는 온건파로 나뉘었다. 이때 그는 [[유성룡]], [[우성전]] 등의 온건파에 대항하여 [[정철]]이 옥사를 날조했음을 주장하고, [[이산해]]와 함께 [[정철]]의 사형을 원하는 강경파의 입장에 섰다. 이후 북인이 소북·대북으로 갈라지자 [[이산해]]·[[이이첨]]과 함께 대북을 이끌었으며, [[1601년]] [[인목대비]]에게서 적통인 [[영창대군]]이 출생하자, 적통을 주장하여 영창 대군을 옹립하려는 소북에 대해 그는 [[광해군]]의 즉위를 주장하였다.
 
1602년에는 스승인 [[조식 (1501년)|조식]]의 문집인 《[[남명집]]》 간행을 주도하였다. [[1604년]] 여름 [[공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퇴했다.
 
[[1606년]] [[소북]]파의 영수 [[유영경]](柳永慶)이 선조가 광해군에게 양위하는 것을 반대하자 이를 탄핵하였다. 그러나 [[1607년]] 소북파 [[이효원]]의 탄핵으로 영변(寧邊)에 유배되었다가,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사헌에 등용되어 대북 정권을 수립하는데 참여하였다. 그러나 곧 사퇴하고 합천으로 낙향하였다. 이후 그의 문하생인 [[이이첨]], [[유자신]] 등이 조정의 실력자로 부상하면서 [[광해군]]이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고 사직상소를 올렸으며 청렴한 생활을 하여 산림정승이라는 별칭을 받았다. 그는 외곽에서 이이첨(李爾瞻)·이산해(李山海) 등 대북의 정권 주도를 지원하고 대북의 고문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