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식 (1501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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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은 외가에서 태어나 살다가 아버지의 벼슬살이에 따라 5세 무렵 서울로 이사했다. 20대 중반까지는 아버지의 임지인 의흥(義興)·단천(端川) 등 외지에 살기도 했으나 대개 서울에 살았다. 그뒤 [[성수침]](成守琛)·[[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여러 책을 다독하던 중 25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은 뒤 크게 깨닫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1527년 중종 22년 부친 상을 당하여 고향에 내려와 3년간 시묘하였고, 1531년 생계가 어려워지자 처가인 김해의 탄동으로 찾아가 산해정을 짓고 제자교육에 힘썼다.
 
[[기묘사화]] 때에 그의 숙부 조언경(曺彦卿)이 죽고 아버지는 좌천되었으며, [[을사사화]] 때는 그의 친구들인 성우(成遇)·송인수(宋麟壽) 등 많은 친구들이 희생을 당하면서 그는 관직에 나가는 것을 단념한다.
 
=== 관료 사퇴와 낙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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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제자로 [[김효원 (성암)|김효원]], 김우옹 등 저명한 학자들과 [[정인홍]] 같은 관료, 의병장 [[곽재우]]가 배출되었다. 일반적으로 낙동강을 경계로 경상우도 지역(오늘날의 경상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학맥을 형성하였다. 유명한 글로는 '단성소'라고 불리는 '을묘사직소'가 있다.
 
1568년 선조가 다시 불렀으나 역시 사양하고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대사(戊辰對事)를 올렸다. 또한 관료들의 폐단을 지적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1569년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사퇴했고, 1570년 선조의 소명(召命)에도 응하지 않았다.
 
1571년 선조가 식물(食物)을 하사하자 이를 받고 사은소(謝恩疏)를 올렸다. [[1572년]]에 죽자 선조는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다. 그의 나이 만 72세였다.
 
=== 사후 ===
[[조선 선조|선조]] 때 [[증직|증]]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에 증직되었다가, [[조선 광해군|광해군]] 때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1576년 조식의 문도들이 덕천의 산천재 부근에 세운 덕산서원(德山書院)에 배향되었고, 그의 고향인 삼가에도 회현서원(晦峴書院)을 세워 봉향하였으며 1578년에는 김해의 탄동에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세웠다. 광해군 때 대북세력이 집권하자 조식의 문인들은 스승에 대한 추존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세 서원 모두 [[사액]]을 받았다.
 
== 사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