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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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Northern view of Gwaneumpo at Yiraksa.JPG|thumb|이순신이 총탄에 맞아 전사한 관음포 앞바다로 인근에 이락사가 있다]]
 
== 기타 ==
=== 자살설 및 은둔설 ===
==== 자살설과 은둔설 의혹의 모티브들====
 
자살설의 근거는, 무엇보다 그를 지원했던 인물인 [[유성룡]]이 적과의 화해를 주장했다고 공격을 받아서 관직을 잃을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이 역적으로 몰릴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다. 자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부분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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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자살설에 대해서도 유효한 비판적 견해이다. 다시 말해 사약을 받아도 궁궐 쪽을 향해 배례를 한 후 죽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던 시대에 후원자인 [[유성룡]]의 파면과 고문 받아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자살을 택한다는 것은 유교적 세계관에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이순신]]이 죽은 지 400년이 지난 지금, 어떠한 주장도 한갓 가설과 추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적탄을 빌어 죽음을 택한 것이든, 마지막 전투임을 알고 전사(戰死)를 위장하여 은둔 생활을 한 것이든, 확실한 단정은 할 수가 없다. 동시에 두 가설을 뒷받침 할만한 결정적인 물증이나 유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도 기존의 전사설을 전복시키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연전무패의 경이적인 전공에도 불구하고 [[백의종군]]과 죽음의 위기를 겪어야 했던 [[이순신]]의 극적인 일생에 주관적 정서가 개입한 ‘동정론’적 가설. 그리고 무능한 조정과 왕실에 대한 상대적 비판을 부각시키는 의도가 깔린 ‘음모이론’ 모두가 공증성과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좀 더 치밀한 연구와 이론적 근거제시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ref>성웅 이순신 [http://www.e-sunshin.com/e-sunshin/research/theme_01_04.jsp 이순신의 죽음에 관한 의문]</ref>
 
=== 원균 모함 논란 ===
일설에는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했다고 하는데, 실록 어디에도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한 내용은 없다. 도리어 이순신이 원균을 비난하였다. 그는 [[옥포 해전]] 후 원균과의 합의를 깨고 몰래 장계를 올려 자신의 전공을 과장했을 뿐 아니라, [[한산대첩]] 후에도 원균을 헐뜯는 내용을 보고했다.<ref name="choi187">최용범, 함규진 저, 《다시 쓰는 간신열전》 (페이퍼로드, 2007) 187페이지</ref>
 
이순신의 보고 중 "원균이 10여 세에 불과한 아들을 외람되게 공로자 명단에 올렸다<ref name="choi187"/>"고 보고했는데, 조사해 보니 원균의 아들 원사웅은 어엿한 청년으로 충분히 전공을 세울 만 했다. [[이순신]]이 수군통제사에서 해임된 것은 원균의 모함 때문이 아니라, 이 '원균에 대한 모함'과, [[부산]]의 왜군 진영을 [[이원익]]의 휘하에서 태워버린 작전을 자신의 작전인 양 거짓 보고를 올린 사건 등이 겹쳐 이루어진 일이다.<ref name="choi187"/>
 
== 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