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제헌의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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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설립과정===
{{본문|삼부회}}{{본문|테니스 코트의 서약}}
전국 삼부회에서 의결 방법 등을 둘러싼 [[제3신분]](평민)과 제1, 2신분(성직자 , 귀족)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따라서 제3신분(그들 자신은 자치 단체라고 칭했다)은 [[1789년]] [[6월 17일]]에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 지도 하에 국민의회의 성립을 선언했다. 하급 성직자들이 합류를 합의했으며 특권 계급의 지지도 얻지 못한 정부도 국민의회를 탄압하려 했다. 이에 대해 의회 세력은 굴복하지 않고 [[6월 20일]]의 “[[테니스 코트의 서약]]” 등을 통해 철저한 항전의 자세를 취했다. 의회와 정부의 심각한 갈등을 우려한 국왕도 국민 의회를 승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많은 성직자와 일부 귀족이 의회에 합류했다. 그 후 국왕의 권고에 따라 너머지 세력도 국민 의회에 참가하여 혼란은 일단 수습되었다. [[7월 9일]]에는 《헌법 제정 국민 의회》로 개칭되어 헌법을 제정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