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통원: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
|||
38번째 줄:
[[1541년]](중종 36) 종사관의 물망에 올랐다. [[1543년]] 2월 세자 시강원 필선(世子侍講院弼善)으로 재직 중 [[경연]]에서의 강론이 바르지 못하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이때 학술이 바르지 못하여 평소 물론이 있고 전에 본원(本院)의 사서(司書)로 있으면서 서연(書筵)에서 강론할 즈음에 바르지 못한 논리를 발설하고도 굳게 고집하고 좀처럼 반성하지를 않는다'고 하자 왕이 수락하여 면직되었다.
이후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병과로 합격하여, [[홍문관]][[부응교]]로 등용된 뒤 시강관(侍講官)으로 임금의 학문을 돕다가 직제학이 되어 조정의 공문서를 도맡아 작성하였다.<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a_A1499_1_0006706 심통원: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ref> [[1546년]](명종 1) [[사간원]] [[대사간]], [[1547년]] [[병조]][[참지]], [[승정원]][[동부승지]]가 되고,
[[1558년]] 초 풍기군수 장문보(張文輔)의 장계를 받고 [[우의정]] 안현(安玹) 등과 함께 훼손된 [[안향]]의 영정을 개수, 복원하는 것을 주선하였다. [[1558년]] [[8월]] [[예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명나라]]에 파견되는[[동지]]사로 [[연경]]에 다녀오기도 했다. [[1558년]] [[12월]] [[의정부]] [[우찬성]]으로 승진했고, [[1559년]] [[의정부]] [[좌찬성]] 등을 지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