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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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활동 ===
현종 14년(1673) 계축 26살에 사마시에 입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숙종1년(1675) 을묘 7월 17일 선친(先親)이 [[예송 논쟁]]으로 화(禍)를 입어 영암에 유배되어 있었으므로 과거(科擧)를 미루고 있던 중 숙종 6년(1680) 경신 4월 3일 선친이 유배(流配)에서 풀려나자 숙종 7년(1681) 신유 내시교관(內侍敎官)을 특별히 제수 받고,받아 관직에 나갔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숙종 10년(1684) 갑자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 재직 중 37살 늦은 나이에 정시문과(廷試文科)에 을과(乙科)로 37살 늦게 급제하여 숙종 11년(1685) 을축 5월 25일 정언(正言), 같은 해 8월 25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같은 해 8월 22일 홍문록(弘文錄) 16명에 뽑히고, 같은 해 11월 16일 도당(都堂)에서 뽑은 홍문록(弘文錄) 15인에 뽑혔다.
 
숙종 12년(1686) 병인 3월 13일 부수찬(副修撰), 같은 해 7월 9일 수찬(修撰), 같은 해 7월 25일 헌납(獻納), 다음날 교리(校理), 같은 해 11월 24일 헌납(獻納), 같은 해 12월 10일 이조좌랑(吏曹佐郞), 숙종 13년 (1687) 정묘 12월 26일 수찬(修撰), 숙종 14년(1688) 무진 2월 6일 검상 (檢詳), 같은 해 3월 18일 수찬(修撰), 같은 해 8월 2일 응교(應敎), 같은 해 5월 15일 부응교(副應敎)에 제수 되었으나, 숙종 15년(1689)기사 윤 3월 21일 기사사화(己巳士禍)로 선친(김수항)이 진도(珍島)에 유배(流配)되어 다음달 9일 사사(賜死)되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장례를 치른 뒤 형제들과 영평(永平=현 경기도포천) 백운산(白雲山) 산중에 숨어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