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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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 활동 및 기타 ====
[[1910년]] [[미국]] [[애틀랜타|애틀랜타 주]]에서 개최된 남감리회 평신도협회 총회에 참석하였고, [[미국]] 감리교선교부의 초청을 받고 [[영국]] [[에딘버러]]에서 개최된 제1차 기독교 세계선교회의(I.M.C)에 참관하고 돌아왔다. [[1916년]]에는 YMCA 청년회 총무, [[1930년]]에는 YMCA 연합회 회장을 맡는 등 기독교계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 활동하였다.<ref name="박노자1"/> 1913년 황성 YMCA 총무에 취임한 [[이상재]]를 도와 YMCA의 혼란을 수습하였으며, 기독교 청년 지도자들의 이탈과 구속, 추방 등의 가운데 [[이상재]]와 함께 YMCA의 간판을 지키고 청년회를 사수하였다. 그 뒤 남부감리교를 한국에 설립하고 선교하는 활동을 하였고, 국제 교회연합사업을 주관하였으며 [[1930년]]부터 윤치호는 한국내 남·북[[감리교회]] 연합을 추진하기도 했다.
 
[[1938년]] [[5월]] 결성된 경성기독교연합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고, [[6월]] [[기독교]]의 [[일본화]]를 달성하기 위해 소집된 [[전조선기독교청년연맹위원회]]에 참가한 후 "이제야 대임(大任)을 마쳤습니다. 우리 기독청년들도 이제는 완전히 내선일체가 되었습니다"라는 요지의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한편 현실생활의 구원을 통하여 [[기독교]]를 정착시키기 위한 실천을 직접 선보였으며 [[기독교]]신앙인들의 신앙 모범촌 건설계획을 추진하기도 하였다.<ref name="daum2" />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의 이사와 부회장, 세계주일학교 한국지회 회장으로도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