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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후 [[1897년]] 중반 [[독립협회]]에 가입하였고, 윤치호는 열정적으로 [[독립협회]] 활동에 참여했다. [[1897년]] [[7월 8일]] 정동에 새로 지은 감리교회 예배당에서 [[배재학당]] 졸업식이 있었고 600명의 청중이 모였다. 1부는 문학 시강으로 [[한문]]과 영어의 공개 강독이 시행되었다.<ref name="황91">이황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91페이지</ref> 윤치호는 [[배재학당]] 졸업식 연설에 참석하였다. 1부는 문학 시강으로 한문과 영어의 공개 강독이 시행되었다.<ref name="황91"/> [[영어]] 강독에서 [[신흥우]]가 영어 문장을 읽고 한글로 유창하게 번역하자 청중들이 크게 호응했다. 이어 [[이승만]]의 [[영어]] 연설이 시작되었는데, 발음도 유창하거니와 [[조선]] 독립을 역설하는 패기가 청중들을 사로잡았다.<ref name="황91"/> 2부는 갈고 닦은 협성회 토론 시범을 보이는 차례였다.<ref name="황91"/> 토론회의 호응도는 높았고 토론은 성공적이었고 서재필은 1년간 자신의 강연을 수강한 학생들 가운데 우등 1명, 이등 1명, 삼등 2명의 학생을 뽑아 각각 5원, 3원, 2원씩의 상금을 수여하였다.<ref>이황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92페이지</ref>
 
[[파일:Young Philip Jaisohn.jpg|thumb|left|180px|동지 [[서재필]]<br>(정치적, 사상적 동지인 그와는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이는 토론회에 내빈으로 참석, 참관하던 윤치호에게도 영향을 주었다.<ref name="황293" /> 협성회 공개 토론회의 성공은 그날 하객으로 참석했던 [[독립협회]] 회원들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다. [[러시아]]에 다녀온 뒤 의기소침했던 윤치호에게 남다른 감격이었다.<ref name="황293" /> 윤치호는 청년들의 역량을 믿고 신분제도 철폐, 적서 차별 철폐, 남녀 차별 철폐, 민중의 참정권 획득을 위한 설득, 홍보작업을 추진해야 된다고 확신한다.
 
이는 토론회에 내빈으로 참석, 참관하던 윤치호에게도 영향을 주었다.<ref name="황293" /> 협성회 공개 토론회의 성공은 그날 하객으로 참석했던 [[독립협회]] 회원들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다. [[러시아]]에 다녀온 뒤 의기소침했던 윤치호에게 남다른 감격이었다.<ref name="황293" /> 윤치호는 청년들의 역량을 믿고 신분제도 철폐, 적서 차별 철폐, 남녀 차별 철폐, 민중의 참정권 획득을 위한 설득, 홍보작업을 추진해야 된다고 확신한다.
[[파일:Young Philip Jaisohn.jpg|thumb|left|180px|동지 [[서재필]]]]
 
[[1893년]] 에모리대학 졸업 직후 윤치호는 [[미국]]에서 [[서재필]]을 만났을때 혹시나 조선의 정국이 변한다고 해도 서재필이 아픈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아 귀국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런데 뜻밖에도 2년 후 한성 정동에서 재회하게 되자 윤치호는 놀라워했다. 그리고 윤치호와 서재필은 독립협회에서 의기투합하여 활동했다.<ref name="황2100"/> 1897년 [[8월 28일]] 윤치호는 [[독립협회]]의 제2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10월]] 원산항재판소 판사로 부임했으며, [[10월 28일]]에는 [[만민공동회]] 회장에 선출됐다. [[독립협회]] 참가 이후에는 [[서재필]](徐載弼)·[[이승만]]·[[이상재]](李商在)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이끌면서, 토론회 개최와 강연 활동을 계속하였다. [[1898년]] [[3월]]에 열린 [[만민공동회]]를 주관할 때는,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 등 반(反) [[러시아]] 운동을 전개하여 부분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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