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 앗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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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파티마 왕조]]가 [[예루살렘 왕국]]의 공격을 받게되어 지원을 요청하자 누르 앗딘은 [[쿠르드족]] 출신의 휘하 장군 [[시르쿠]] (살라흐 앗 딘의 삼촌)를 이집트로 파견했다. [[1169년]] [[살라흐 앗딘]]이 이집트의 재상이 되어 이집트를 완전히 지배하에 두었다. 그러나 살라흐 앗딘이 사실상 독립하여 1171년, 1173년 누르 앗딘의 예루살렘 공격에도 참가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자신과 누르 앗딘 세력의 완충지대로 존속하길 바랐다.
 
[[1174년]] 독립한 살라흐 앗딘을 처벌하기 위해 이집트 원정을 준비하던 누르 앗딘은 5월에 열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의 아들이아들 [[앗살리흐 이스마일 (장기 왕조)|앗살리흐 이스마일]]이 그의 뒤를 이었으나, 1185년 살라흐 앗딘의 이집트 정권([[아이유브 왕조]])에게 병합당한다.
 
예루살렘 공략과 [[제3차 십자군]]등의 전투로 인해 이슬람의 영웅으로써 살라흐 앗딘이 유명하지만, 그 기반은 누르 앗딘이 만든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용모가 수려하고 단정하며 용맹한 전사여서 전장에서는 활과 화살통을 2개나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솔선하여 전선에서 싸웠다고 전해진다. 또한 알레포, 다마스쿠스등에 누리야 대학은 그가 창설한것으로 셀주크 왕조의 [[니자미야 대학]]과 함께 시리아 일대에 하나피 법학파등의 [[수니파]] 교학의 진흥에 큰 공헌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