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다이라 기요야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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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야스는 다시 동서로 군대을 보내어 미카와 국 통일을 목표로 세력을 넓힌다.
 
[[1529년]]([[교로쿠]] 2년), 오지마 성(尾島城, [[오지마 성]]小島城이라고도 함; [[니시오 시]]西尾市 소재)를 공격해 획득한다. [[1530년]](교로쿠 3년)에는 [[오와리노쿠니|오와리]]에도 출병하여 이와사키 향(岩崎郷, [[닛신 시]]日進市 이와사키)와 시나노 향(品野郷, [[세토 시]]瀬戸市 시나노 정品野町)을 빼앗는다. 그 한편으로, 동 미카와에도 진출하여 [[마키노 씨]](牧野氏)의 이마하시 성(今橋城, 후의 [[요시다 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기요야스는 다시 요시다 성의 남쪽 [[아쓰미 군]](渥美郡) 다하라(田原)에 진군한다. [[도다 씨]](戸田氏)는 싸우지 않고 항복하여, 기요야스는 요시다 성에 병사를 되돌려 10일간 성에 머물렀다. 이 사이에 북쪽 [[시타라 군]](設楽郡)의 [[야마가 산포슈]](山家三方衆) [[스가누마 씨]](菅沼氏) 일족과 [[오쿠다이라 씨]](奥平氏), [[호이 군]] [[우시쿠보 성|우시쿠보]](牛久保)의 마키노 씨 등의 동 미카와 고쿠닌슈(国人衆)의 대부분이 종속을 자처해 왔다. 다만 미카와의 동단 야나 군(八名郡)에 있던 [[우리 성]](宇利城)의 [[구마가이 씨]](熊谷氏)만이 복속을 거부했기 때문에 성를성을 포위하여 [[11월 23일]]([[음력 11월 4일]])에 공격하여 낙성시켰다.<ref>기요야스의 요시다 성 공격을 우리 성 공격의 직후라고 하는 설도 있고, 또 이때에 항복한 요시다의 마키노 씨가 [[1532년]](덴분 원년)에 다시 배반한 것으로 재차 이것을 공격해 멸했다고 여겨진다.</ref> <ref>《미카와 이야기》에서는 기요야스가, 구마가이가 성으로 밀려들어갈 즈음에, 서쪽에서 철포를 쏘았다고 기재되어 있다. 1530년(교로쿠 3년)의 일이라고 여겨진다. 《[[철포기]](鉄炮記)》의 기술과는 모순되지만, 이때 이미 철포를 장비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가 닌자(伊賀忍者) [[핫토리 야스나가]](服部保長)도 기요야스의 시대에 임관하고 있던 것에서, 화약과 철포의 취급에 익숙해져 있던 이가슈로부터 초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 이 때에 서 미카와 사람 8,000명을 동원하고 있어 석고가 낮은 미카와 국에서 압도적인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 엿보인다.</ref> 이것으로 미카와 국 통일을 달성한다. 다만 일설에 따르면 우리 성 공격 이후, [[사쿠라이 마쓰다이라 가]](桜井松平家)인 숙부 [[마쓰다이라 노부사다|나이젠 노부사다]](内膳信定)와의 불화가 악화되었다고도 말해진다.
 
그 이유로 들 수 있는 것이 우리 성 공략전에서 생긴 사건이다. [[오테몬]]을 공격한 [[후카마 마쓰다이라 가]](福釜松平家)인 숙부 [[마쓰다이라 지카모리|사쿄노스케 지카모리]](左京亮親盛)를 잃을 즈음에, 지원에 늦은 노부사다를 기요야스가 매도했다고 한다. 기요야스 자신은 그때 뿐인 질책이었을 것이지만, 질책을 당한 노부사다의 입장에서 본다면 원한을 계속 품어서 종가 찬탈의 기회를 노린다는 결의를 굳혔던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