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영주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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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 배경 ==
황국신민화 정책 때문에 강제로 일본 국민이 되었던 조선 사람이 지금과 같이 감시와 관리 대상인 외국인으로 분류된 것은 1947년 외국인등록령을 공포한 뒤부터다.대부분 어쩔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일본에 끌려오다시피 한 조선 사람들은 해방 뒤에 귀국을 염원했지만, 결과적으로 현재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서 특별영주자로 생활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게 된 데에는 크게 3가지 이유가 있다.<br>
황국신민화 정책 때문에 강제로 일본 국민이 되었던 조선 사람이 지금과 같이 감시와 관리 대상인 외국인으로 분류된 것은 1947년 외국인등록령을 공포한 뒤부터다. 강제로 끌려오거나 조국에서 먹고 살 길이 없어 일본에 오게 된 조선 사람들은 해방 뒤에 귀국을 서둘렀지만, 미 점령군과 일본 정부는 귀국을 방해하며 조국에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막았다. 이는 전후 일본 재건을 위한 값싼 노동력을 잃지 않으려는 것뿐만 아니라, 일제의 만행이 폭로되면 받게 될 국제 사회의 비난을 막기 위해서였다.(실제로 조선 사람들이 귀국하려고 탄 배를 폭파한 ‘[[우키시마 호 폭침 사건]]’도 있다.) 그 밖에 조국에 돌아가도 가족이 없거나 생활기반이 없어 귀국을 포기하는 사람, 배삯조차 없어 일본을 못 떠나는 사람들이 일본에 남게 되었다. 반면, 제주 4·3 사건이나 한국 전쟁의 전화로부터 피하기 위해서, 외화 벌이를 위해서, 또는 유학을 위해 많은 한국·조선인이 일본에 이민해 특별 영주 자격을 얻기도 했다. 일례로 1950년 6월 28일의 산업 경제 신문(현 산케이신문의 옛이름) 조간은 「종전 후, 우리나라에 불법 입국한 조선인의 연간 총인원은 약 20만에서 40만으로 추정되어 전체 재일 조선인 추정수인 80만명의 절반에 달하고 있다」고 전한다. 이렇게 해방 이전에 남아있던 세력과 한일 협정 이전에 들어온 한국인들이 특별영주자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자세한 역사는 [[재일 한국인]] 항목의 '역사']] 참조)
첫번째로, 미 점령군과 일본 정부가 해방 이후 조선인들의 귀국을 방해하며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막았다. 이는 전후 일본 재건을 위한 값싼 노동력을 잃지 않으려는 것뿐만 아니라, 일제의 만행이 폭로되면 받게 될 국제 사회의 비난을 막기 위해서였다.(조선 사람들이 귀국하려고 탄 배를 폭파한 ‘[[우키시마 호 폭침 사건]]’은 대표적인 일제의 만행 중 하나이다.) <br>
두번째로, 당시 일본에서 생활을 하던 사람들 중에는 고향에 돌아간다 해도 45년에 달하는 일제의 식민지배로 혈육이나 생활기반이 전혀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해방 직전까지 철저한 착취상황에서 고통받다 방금 해방된 사람들에게는 귀향하는 배를 탈 경제적 여유조차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현실적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남게 되었다.<br>
세번째로, [[제주4.3사건]]이나 [[6.25 전쟁]]과 같은 비극으로부터 피하기 위해서 한국을 탈출한 사람들, 외화 벌이를 위해 일본에서 직장을 구한 사람들, 전쟁 이후 선진기술을 물색하여 유학을 온 사람 등 많은 한국·조선인이 일본에 이민해 특별 영주 자격을 얻었다. <br>
1950년 6월 28일의 산업 경제 신문(현 산케이신문의 옛이름) 조간은 「종전 후, 우리나라에 불법 입국한 조선인의 연간 총인원은 약 20만에서 40만으로 추정되어 전체 재일 조선인 추정수인 80만명의 절반에 달하고 있다」고 전한다. 이렇게 해방 이전에 남아있던 세력과 한일 협정 이전에 들어온 한국인들이 특별영주자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자세한 역사는 [[재일 한국인]] 항목의 '역사']] 참조)
 
== 한국 국적과 조선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