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티안 왕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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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3년]] 비엔티안 왕국은 루앙프라방 왕국의 침공을 받지만, 이 때 푼나산은 동맹 관계에 있던 [[시암]]에게 원군을 요청하고 않고, 주둔지가 가깝다는 이유로 당시 시암과 전쟁 상태에 있던 [[꼰바웅 왕조]]([[버마]]) 원군을 요청했다. 치앙마이에서 원군 요청을 받은 버마군 지휘관 포스파라는 요청을 받은 것을 루앙프라방 측에 알려서 싸우지 않고도 양국을 권력 하에 두는데 성공했다. 다음 해인 [[1774년]]에 푼나산은 버마와 협력하여 샴에 파병했기 때문에, 샴의 [[탁신 왕]]은 비엔티안 왕국을 믿지 못하고, 표면적인 외교만 수행하게 되었다. 1777년 버마의 침공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 시암은 그 다리를 건너 비엔티안을 침공하여 수도를 점령하고 비엔티안 왕국을 속령으로 삼았다.
 
시암은 에메랄드 부처와 사로잡은 수많은 귀족 등을 전리품으로 얻고, 1780년에 철군했지만 푼나산은 시암 침공 때 도망친 캄크트 지역에서 1781년 사망했다. 그리하여 딱신 왕은 비엔티안의 새로운 왕으로 [[차오 난타센]]을 옹립했다. 1782년에 [[붓다 요드파 출라로께푸타욧파쭐라록]] 딱신 왕을 죽이고, 라마 1세에 등극하여 [[짜끄리 왕조]]를 세웠고, 비엔티안 왕국은 시암에서 상당한 자치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비엔티안 왕국은 [[1787년]] [[므앙 푸안]]의 영토를 둘러싸고 [[떠이선 왕조]]([[베트남]])와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 충돌은 [[응에안 성]]의 카이산에 의해 베트남 측에 승리로 돌아갔고, 이후 므앙 푸안은 비엔티안 왕국 영토이면서 베트남 왕조([[떠이선 왕조]]와 [[응우옌 왕조]])의 세력 하에 놓인 매우 불안정한 지역이 되었다.
 
차오 난타센 사후 왕위는 동생 인타라봉이인타라웡이 계승하였고, [[1798년]]부터 1799년 사이 샴이 지휘한 버마 잔당 소탕작전에 참여했다. 이때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던 차오 아누봉을아누웡을 높이 평가한 시암은 [[1803년]]에 인타라봉이 사망하자 차오 아누봉을아누웡을 [[세타티랏 3세]]로 왕위를 잇게 했다. 세타티랏 3세의 치세(1804 - 1829)에 비엔티안 왕국은 황금기를 맞아 [[1807년]] 새로운 왕궁을 건립하고, [[1808년]]의 타트 파놈 다리의 건설 및 시분판 사원([[농카이 주]])의 건립, [[1824년]]의 세인 사원의 건립 등 각지에서 당시의 토목 기술의 정수를 보여준 사원과 시설의 정비가 행해졌다.
 
[[1827년]], 세타티랏 3세는 왕실 회의를 열고 시암 짜끄리 왕조가 국내외로 혼란한 정세인 것을 틈타서 속국에서 벗어나 독립을 꾀하였다. 이 전략은 여러 신하들의 반대했지만, 밀어 붙인 세타티랏 3세는 비밀리에 [[방콕]]에 파병을 진행했다. 그러나 이를 알아챈 루앙프라방과 전략 자체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부왕 티사 등에 의해 전략이 누설되었다. 결국 작전 도중에 시암에 간파되어 왕도 비엔티안을 시암이 점령하여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