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오케팔론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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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rusades surprised by turks.jpg|thumb|left|이 그림은 [[구스타브 도레]]가 미리오케팔론의 길에 매복한 투르크군을 보여주고 있다. 이 매복으로 콘야가 함락되어 마누엘의 희망은 무너졌다.]]
 
비잔티움 군 선봉대는 아르슬란의 군대와 마주쳐,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돌파에 성공했고, 본대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룸 셀주크군은 아직 확실하게 전투대형을 편성하지 못했던 것 같다.<ref>Haldon, p. 142.</ref> 선봉과 본대가 계곡을 거의 돌파했을 무렵, 후방은 이제야 막 계곡에 돌입하고 있었다. 이는 룸 셀주크 군으로 하여금 잔여부대들에게 그들이 쳐 놓은 함정에 근접하도록 하게 해 주었다. 고지대에서부터 움직이기 시작한 룸 셀주크 군은 공격을 시작했고, 특히 비잔티움 제국군의 우익에 가해졌다. 우익은 빠른 속도로 분쇄되고 격파 당했으며, 도망치는 병사들은 다른 병사들까지 도망치게 만드는 등 공포가 전염되었다. 우익은 많은 사상자를 입었고, 그들의 사령관 보두앵(Baldwin)은 전사했다.<ref>Choniates, p. 102; Haldon, pp. 142-143.</ref> 룸 셀주크군은 그들의 공격을 보급물자와 공성기에 집중하여 물자를 운송하는 말을 활로 쏴 쓰러트리거나 마차가 움직여야 하는 길을 봉쇄하였다. 좌익부대 역시 룸 셀주크군의 공격으로 심각한 사상자를 입었으며, 좌익의 사령관 얀 칸타코우제노스는 룸 셀주크의 병사 여러 명과 홀로 싸우다가 전사했다.<ref>Choniates, p. 104.</ref> 비잔티움 군의 잔여부대는 그들 앞에서 벌어진 대학살과 후방에 가해진 룸 셀주크 군의 공격으로 패닉상태에 빠졌다. 갑자기 눈을 가릴 정도의 먼지바람이 불어오자, 비잔티움 군은 이 먼지바람이 룸 셀주크 군 역시 혼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사기와 조직력을 재정비할 수 없었다. 이때 마누엘 황제는 자신감의 위기를 격는겪는 듯이 했으며,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주저 앉아서 수동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군대에게 처해진 운명을 기다리는 듯 했다고 한다.<ref name="Haldon, p. 143">Haldon, p. 143.</ref> 황제는 그의 장교들의 격려로 정신을 차리고, 군율을 회복하고, 군대를 재정비하여 방어진형을 형성하였고, 이렇게 재 정비된 비잔티움 제국군은 보급물자들이 널브러져 걷기가 힘든 상황이 된 계곡의 길을 빠른 속도로 돌파했다. 이렇게 돌파하여, 후방의 부대는 얀(Jhon)과 안드로니코스 안겔로스(Andronikos Angelos), 콘스탄틴 마크로두카스(Constantine Makrodoukas), 그리고 안드로니코스 라파르다스(Andronikos Lapardas)가 지휘하며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은 상태에서 계곡을 돌파하여 요새화된 진영을 구축한 상태에 있던 선봉부대와 본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가 지휘하던 후방부대도 황제가 지휘하던 부대보다 덜 피해를 입은 상태로 진영에 도착하였다.<ref>Choniates, p. 105.</ref>
 
밤 동안 비잔티움군은 셀주크군의 기마궁수들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였다.<ref name="Haldon, p. 143"/> 코니아테스(Choniates)의 기록에 따르면 마누엘 황제는 그의 병사들을 버리고 도망치려 하였으나, 이름 모를 병사의 낙서와 충격을 받은 콘토스테파노스의 격렬한 반대에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ref>Choniates, pp. 105-106. Manuel may have had the fate of Romanos Diogenes in mind and have had some apprehension of being captured. His situation was, however, very different to that of Diogenes. Unlike the case of earlier emperor, Manuel's troops had not dispersed on the battlefield but had drawn together following their defeat and were still capable of defending themselves.</ref> 그러나 이 사실은 마누엘 황제가 전장에 있을 때보다, 그의 군대 한 가운데에 있을 때 더 위험한 상태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가의 수사학적 과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음날 룸 셀주크군은 비잔티움 군 진영을 포위하여 활을 쏘아댔고, 마누엘 황제는 두 번의 반격명령을 내려 이를 각각 얀 안젤로스와 콘스탄틴 마크로두카스에게 맡겼으나, 전체적인 상황에서 변화는 없었다.<ref>Choniates, p. 106. It is notable that the two generals leading the counterattacks commanded units which had suffered negligible losses the previous day. It is probable that the Byzantine counter-attacks achieved little because, once in open country, the Seljuks were reluctant to come to close combat with the more heavily armoured Byzantine cavalry, and the Byzantines were unwilling to pursue too far for fear of further ambushes.</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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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
<references/>
 
 
==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