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상호방위조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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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상호방위조약'''(韓美相互防衛條約, the ROK-U.S. Mutual Defense Agreement)은 [[1953년]] [[10월 1일]] 체결되고 [[1954년]] [[11월 18일]] 조약 제34호로 발효된 [[대한민국]]과 [[미국]]간의 상호방위조약이다.
 
*[[1953년]] [[6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브릭스 대사와 회동을 하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필요성을 누차 강조하였는데, 당시는 미국 주도로 휴전 협정이 진행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에 앞서 안정적인 국가 안보를 위해 미국에 상호 방위 조약에조약을 대한요구했지만 미국의 반응이반응은 시원치 않자,않았다. 이승만은미국은 [[6월 18일고립주의]] 전통이 2만강했기 5천명의때문이다. 반공당시만 포로들을해도 직권으로미국과 석방해양자 버렸다.상호방위조약을 휴전협정맺었던 체결을나라는 무산시킬[[필리핀]] 수도밖에 있는없었으며, 조치였다.현재까지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을[[영국]], 강력히[[일본]], 요구하는 이승만 대통령의[[필리핀]] 승부수였다뿐이다. 당시그나마 아이젠하워영국은 대통령은미국의 이승만에게핵기술을 '약속제공하기 파괴'라며위한 비난했고조약이었고, 덜레스도일본은 마찬가지재무장 의도로금지와 '이승만맞물려 제거'의있는 필요성을 검토하기도 했다조약이다. <ref> 차상철박성현, <이승만과일본을 1950년대의벗기다 한미동맹해설> <<해방이승만의 전후사의일본을 재인식벗기다>> 2권(책세상두두리, 2006년2010년). 269~270쪽. </ref>
 
상호 방위 조약에 대한 진전이 미미하자 이승만은 [[6월 18일]] 약 2만 5천명의 반공 포로들을 직권으로 석방해 버렸다. 휴전협정 체결을 무산시킬 수도 있는 조치였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강력히 요구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승부수였다.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에게 '약속 파괴'라며 비난했고, 덜레스도 마찬가지 의도로 '이승만 제거'의 필요성을 검토하기도 했다. <ref> 차상철, <이승만과 1950년대의 한미동맹>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2권(책세상, 2006년). 269~270쪽. </ref>
 
* [[1953년]] [[8월 3일]]부터 협상에 들어가 [[1953년]] [[8월 8일]] 그 최종안을 [[서울특별시|서울]]에서 가조인하였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크게 만족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성립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조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번영을 누릴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이번 공동조치는 외부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함으로써 우리의 안보를 확보해 줄 것이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