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폰 바이에른 선제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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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2세'''(Maximilian II, [[1662년]] [[7월 11일]] [[뮌헨]] – [[1726년]] [[2월 26일]] 뮌헨)는 대개 '''막스 에마누엘'''(Max Emanuel) 혹은 '''막시밀리안 에마누엘'''(Maximilian Emanuel)<ref>[[Charles Spencer, 9th Earl Spencer|Spencer, Charles]]. ''Blenheim: Battle for Europe.'' Phoenix (2005). ISBN 0-304-36704-4</ref>로 알려져 있다. 그는 [[바이에른]](Bavaria)의 [[비텔스바흐 왕가|비텔스바흐 가]](Wittelsbach)의 지배자로서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Kurfürst)이다. 또한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마지막 총독이자 [[룩셈부르크]] 공작이었다.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그의 야망은 그를 전쟁에 끌어들였고, 한계에 이르렀으나 결국 최종적으로 열망하던 왕가의 꿈을 이루었다.
 
그는 [[뮌헨]]의 [[바이에른 선제후 페르디난트 마리아]](Ferdinand Maria, Elector of Bavaria)와 [[사보이의 헨리에테 아델하이트]](Enrichetta Adelaide di Savoia, 1676년 죽음)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가의 조부모는 [[사보이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Victor Amadeus I of Savoy)와 [[프랑스의 마리아 크리스티나]](Christine Marie de France)였다.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프랑스의 [[앙리 4세]](Henry IV of France)와 2번째 부인인 [[마리 드 메디시스]](Marie de' Medici)의 둘째딸이었다.
 
==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전쟁 ==
1679년 막시밀리안은 어린나이에 선제후직을 계승했다. 1683년 이미 그는 군사경력을 쌓기 시작했는데, 유럽에 이슬람교 세력을 확장하려고 시도하는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대항해 [[빈]](Vienna)을 방어하는데 주력했다. 궁정에 돌아온 그는 [[1685년]] [[7월 15일]] [[레오폴트 1세 (신성 로마 제국)|신성로마황제 레오폴트 1세]]와 [[스페인의 마르가리타 테레사]] 사이에서 태어난 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마리아 안토니아]]와 결혼했다. 그의 명성은 모두가 인정했기에 1688년 투르크의 [[베오그라드 공방전 (1688년)|베오그라드 공방전]]에서 지휘를 맡았다.
 
[[대동맹 전쟁]]에서 그는 [[합스부르크 왕가]] 편에서 싸우며, 라인 국경을 지켰고, 황제에 의해 1692년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 총독목록|총독]]으로 임명되었다.
 
==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 ==
그는 네덜란드에서 막시밀리안 에마누엘 왕가를 만들려는 야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해 총독에 임명되었으나 아내 마리아 안토니아는 죽었다. [[1694년]] [[1월 12일]] 그의 야망에 대안이라 할 수 있는 방법이 제안되었는데, [[테레사 쿠네군다 소비에스카]](Teresa Kunegunda Sobieska)와 결혼한 것이다. 그녀는 선출된 폴란드 왕 [[얀 3세 소비에스키]](Jan III Sobieski)의 딸로서 몇 년 후 아버지가 사망하자 막시밀리안은 폴란드 정사(政事)에 영향력을 발휘할 잠재적 위치에 있었다.
 
그렇지만 막시밀리안은 [[서유럽]]에 관심을 집중했고, 테레사 쿠네군다 소비에스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카를 7세|카를 알베르트]](Charles Albert)와 [[바이에른의 클레멘스 아우구스트|클레멘스 아우구스트]](Klemens August)는 그의 야망의 주요 배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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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
1699년 막시밀리안 에마누엘의 첫 번째 아들 [[바이에른 공작 요제프 페르디난트|요제프 페르디난트]](Joseph Ferdinand)가 스페인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으나 얼마안가 죽고 말았다. 1701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왕위를 합스부르크 가문이 아닌 자신의 비텔스바흐 가문으로 대체하려는 계획을 갖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을 상대로 그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으나, 1704년 [[블렌하임 전투]]에서 비참한 패배를 당하면서 그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뒤이어 그는 네덜란드 궁전으로 도피했으나, 그의 가족은 갈라져 아들들은 포로로 잡혀 [[오스트리아]]에서 몇 년을 보내게 되었고, 클레멘스 아우구스트는 [[예수회]]에서 데려가게 되었다. 바이에른은 오스트리아와 [[라인 궁중백]](elector palatine)이 분할하자, 비텔스바흐의 [[팔츠 선제후 요한 빌헬름|요한 빌헬름]](John William)의 지휘로 오스트리아 제국 군대에 대항해 사람들이 유혈의 봉기를 일으켰다.
 
막시밀리안 에마누엘은 [[라미예 전투]](1706년 5월 23일) 이후 다시 군대를 피해 네덜란드에서 도망쳐 안전한 도피처로써 [[베르사이유]]의 프랑스 궁전으로 갔다. 1712년 동맹인 프랑스는 막시밀리안 에마누엘에게 [[룩셈부르크]]와 [[나무르]](Namur)를 양도했다. 이 전쟁은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끝을 맺었고, 막시밀리안 에마누엘은 돌아가게 되었다. 다만 그의 가족은 1715년에 이르러 뮌헨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