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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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attle of Prague, 6 May 1757 - Penetration.gif|thumb|250px|right|프로이센군의 돌파.]]
프리드리히 대왕과 [[한스 요아힘 폰
전투의 최종국면은 약 오후 3시경에 시작되었다. 이때 프로이센군은 여전히 전열을 유지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러는 동안 프로이센군은 남쪽으로부터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카를 공은 프라하로 물러났으며, 퇴각의 후위는 오스트리아의 기병대가 맡아 분전했다.
▲전투의 최종국면은 약 오후 3시경에 시작되었다. 이때 프로이센군은 여전히 전열을 유지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러는 동안 프로이센군은 남쪽으로부터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카를 공은 프라하로 물러났으며, 퇴각의 후위는 오스트리아의 기병대가 맡아 분전했다.
==영향==
오스트리아군은 12,000명의 병력을 잃었고, 4,500명이 포로로 잡혔다. 프리드리히는 14,000명의 병력을 잃었다. 단순히 사상자만 비교해 보았을 때는 오스트리아 측의 사상자가 프로이센 측보다 적었다. 프리드리히는 프라하에서 공성전을 벌이길 포기하고 포위작전을 펼쳤다. 프리드리히는 40,000명의 병력과 75,000명의 주민들이 얼마 안 있어 성내의 물자를 모두 소비할 것이라고 계산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프라하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오스트리아의 지원군을 예상하지 못했고, 결국 [[콜린 전투]](Battle of Kolín)가 벌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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