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기데온 폰 라우돈 남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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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Wien Maria-Theresien-Denkmal Gideon Ernst von Laudon.jpg|thumb|right|[[마리아 테레지아]]광장에 있는 에른스트 기데온 폰 라우돈의 기마상]]
 
라우돈은 러시아의 명령을 받는 조건으로 연합하는 오스트리아군 지휘관이 되어 [[쿠너스도르프 전투|쿠너스도르프]](Kunersdorf)에 참전해 [[표트르 살티코프]](Pyotr Saltykov) 지휘하에서 연합한 러시아-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게 대승리를 거뒀다. 그 결과 라우돈은 Feldzeugmeister으로 승진하면서 보헤미아, 모라비아와 실레지아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1760년 그는 [[란츠후트]](Landshut)와 [[그라츠]](Glatz)의 [[그라츠 공방전|중요한 요새를 급습]]해 [[하인리히 오귀스트 데 라 모테 푸케|푸케]](Fouqué) 지휘하의 프리드리히 군의 군단을 격파했다. 1760년 그는 [[리그니츠 전투 (1760년)|리그니츠 전투]](1760년 8월 5일)에서 거꾸로 프리드리히 손에 패배했는데, 이후 라우돈이 주장하길 자신의 군대를 지원하지 않고 가만히 있던 주요 군대의 지휘관 [[레오폴트 요제프 폰 다운|다운]](Daun)과 [[프란츠 모리츠 그라프 폰 라시|라시]](Lacy)의 행동에 대한 고통스런 논쟁에 들어가게 되었다.

1761년 그는 행동을 재개해 평소처럼 실레지아에서 그의 러시아 동맹과 함께 쿠너스도르프 이후 소심해져 [[분첼비츠]](Bunzelwitz)의 프리드리히의 참호로 에워쌓여진 진지를 발견하고, 그걸 상대로 모든 시도를 해보았으나 실패했다. 1761년 9월 30일/10월 1일 밤에 있었던 [[슈바이드니츠]](Schweidnitz) 급습은 찬란한 공적에 비해 그의 하나의 덧없는 호기였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행동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어져 다운과 라시의 임시변통적인 전략과는 눈에 띄게 달랐다.

7년 전쟁의 이후 전역을 공부한다면 아마 다운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침략력(aggressiveness)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라우돈이란 천재와 한 쌍을 이루는 것을 경계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오스트리아 군에서 이들을 가리켜 부르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파비우스]]"(Fabius)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마르켈루스]]"(Marcellus)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어진 충돌은 전쟁이 끝나는 마지막 3년 동안 계속되어졌다.
 
==이후 경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