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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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생애 초기 ===
==== 세손 시절 ====
[[파일:정조 편지 01.jpg|thumb|left|left|100px|정조어서, 정조가 세손 시절인 8세때 직접 쓴 [[한글]] 편지]]
정조는 [[1752년]](영조 28년) [[음력 9월 22일]] [[조선 영조|영조]]의 둘째 아들인 [[조선 장조|사도세자]]와 [[헌경왕후|혜빈 홍씨]](혜경궁 홍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창경궁의 경춘전(景春殿)에서 태어났다. 형인 [[의소세손]]이 3살의 어린 나이로 먼저 요절한 뒤 태어났기 때문에 탄생 당일 영조에 의해 원손(元孫)으로 호가 정해졌다.<ref>이 날 원손정호(元孫定號)를 정식으로 하기 전에 조정에서 먼저 문안하였는데, 이에 대해 영조는 원손정호를 정식으로 하기 전의 왕손(王孫)에 대한 조정 문안은 절차에 맞지 않다고 하교했다.</ref> 그의 형인 [[의소세손]]이 3세의 나이로 요절하였으므로 그는 바로 세손으로 책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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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1년]](영조 37년) [[음력 3월 10일]]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음력 3월 18일]] 경현당(景賢堂)에서 관례(冠禮)를 행하였으며, 이듬해인 [[1762년]](영조 38년) [[음력 2월 2일]] 어의궁(於義宮)에서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딸인 [[효의왕후|청풍 김씨]](淸風 金氏)와 가례(嘉禮)를 올렸다.
 
[[1776년]] [[음력 3월 5일]] 영조가 [[경희궁]](慶熙宮) 집경당(集慶堂)에서 83세로 승하하자, [[음력 3월 10일]] 숭정문(崇政門)에서 25살의 나이로 조선의 제22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 동궁 시절 ====
아버지 [[조선 장조|사도세자]]는 [[소론]]에 동정적이었지만 그의 외가는 [[노론]]으로 외할아버지 [[홍봉한]], 외종조부 [[홍인한]]은 [[노론]]의 지도급 인사였다. 어머니 [[헌경왕후|혜경궁]]은 친정 쪽을 지지하고 남편 [[조선 장조|사도세자]]를 외면하였다. [[노론]]의 지지를 받던 [[조선 영조|영조]]는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아들 [[조선 장조|사도세자]]를 못마땅히 여겼고, 정신이상이라는 핑계로 뒤주에 가두어 죽인다. 8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살려줄 것을 청하다가 병사들에 의해 끌려나가고 부친의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아버지 [[조선 장조|사도세자]]가 부왕과 다른 정견을 피력하다가 죽임당한 것을 안 그는 일체의 정치적 발언을 삼가하고 [[개유와]]라는 독서실을 짓고 독서와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가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것을 불안하게 여긴 [[홍봉한]] 가문과 또다른 외척인 [[정순왕후]] 가문, 고모 [[화완옹주]]와 그녀의 양자인 [[정후겸]] 등은 세손을 제거하려 한다. 그러나 세손궁의 막료로 배치된 [[홍국영]]이 기민한 재주로 그들의 음모를 차단한다. 한번은 세손이 읽던 강목에서 서자에 대한 내용이 있었는데, 할아버지 [[조선 영조|영조]]는 서자에다가 천한 무수리 출신의 아들이라는 것에 오랫동안 컴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조선 영조|영조]]가 세손이 공부하는 책을 불시에 검사하려 하자 [[노론]]측에서는 그가 강목을 읽었다고 보고했고, [[노론]]의 무고를 예상한 [[홍국영]]은 서자 라는 부분을 모두 종이로 가려버렸다. 세손은 서자 라고 쓴 부분은 가리고 읽지 않았다고 했고, 강목의 해당 부분은 흰 백지로 가려져 있었다.
 
25세가 된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려 하자 [[좌의정]] [[홍인한]]이 극구 반대했다. 그러나 할아버지 [[조선 영조|영조]]는 세손의 손을 들어주어 대리청정을 하게 된다. 대리청정을 시작한 지 얼마 뒤, [[1776년]] [[음력 3월 5일]] 영조가 [[경희궁]](慶熙宮) 집경당(集慶堂)에서 83세로 승하하자, [[음력 3월 10일]] 숭정문(崇政門)에서 25살의 나이로 조선의 제22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 즉위 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