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그라드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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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울루스의 항복 ===
포위망에 갇힌 독일군은 소련군의 맹공 때문에 시의 외곽으로부터 시내로 철수했다. 이에 따라 그동안 공중 보급이 이루어지던 피톰닉과 굼락크 두 공항을 잃었다. 독일군은 이제 기아에 허덕일 뿐만 아니라 실탄도 떨어져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독일군은 소련군이 포로를 처형할 것이라는 생각에 결사적 항전을 계속했다
특히 [[히비]]라고 불리는 소련군 출신 독일 부역자들은 잡히면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결사적이었다. 그들을 공격하던 독일군을 역(逆)포위한 소련군은 포위망을 강화하여야만 했다. 다시 한 번 피비린내 나는 시가전이 시작되었고, 이번에는 독일군이 볼가 강 강둑으로 밀려났다.
히틀러는 파울루스를 자신의 집권 10주년 기념일인 1월 30일에 원수로 승진시켰다. 지금까지 포로가 된 독일의 원수가 없었음을 상기시키며 히틀러는 파울루스에게 자결하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낸 셈이다. 하지만 다음 날 소련군이 폐허가 된 백화점 건물에 차렸던 사령부로 진입하자, 파울루스는 이런 히틀러의 기대를 저버리고 항복하고 말았다. 2월 2일 항복한 독일군 포로는 22명의 장성급을 포함한 91,000명이었다. 이들은 기아와 질병에 싸울 기력을 잃어 도저히 더 싸울 수 없었다. 처음에 스탈린그라드에 갇혔던 25만 명의 추축국 병사 중 항복한 포로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사망했다. 파울루스의 항복에 대해 히틀러는 “그는 영광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앞두고 모스크바로 가는 길을 택했다.”라며 화를 냈다.▼
1943년 1월 소련군은 (1) 모든 포로에 대한 안전 보장, (2) 독일군 환자와 부상병에 대한 의료 지원, (3) 포로의 개인 소지품 소지 허가, (4) 정규 식량 지급, (5) 전쟁이 끝난 후 송환 등의 조건을 내걸고 파울루스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냈다. 이는 심리전 차원에서 선전 삐라로 만들어져 포위된 독일군에게도 뿌려졌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이를 거부했고 다시 전투가 재개되었다.
[[1월 20일]] 크로아티아 의용군 부대를 이끌던 [[빅토르 파비치치]]가 전사하고 히틀러는 파울루스를 자신의 집권 10주년 기념일인 [[1월 30일]]에 원수로 승진시켰다. 지금까지 포로가 된 독일의 원수가 없었음을 상기시키며 히틀러는 파울루스에게 자결하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낸 셈이다. 하지만 다음 날 소련군이 폐허가 된 백화점 건물에 차렸던 사령부로 진입하자, 파울루스는 이런 히틀러의 기대를 저버리고 항복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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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전을 계속한 추축국 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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