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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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ccffcd|1941년 12월 5일}}
]]
{{본문|바르바로사 작전|바일리스토크-민스크 전투|키예프 전투 (1941년)}}
[[1941년]] [[6월 22일]] 오전 4시 45분, 이탈리아, 루마니아 및 다른 동맹국 병사들이 포함된 300만 명의 독일군이 국경선을 넘어 소련으로 쳐들어갔다. 한 달간, 3방향으로 나뉜 공세는 [[전격전]] 전술 교리에 따라 전차부대가 돌격하는 동안 천천히 이동하던 [[보병]] [[사단 (군사)|사단]]들이 포위망을 완성하여 수십만의 소련군 부대를 괴멸시켰다. 이 기간 동안 [[독일 공군]](Luftwaffe)은 소련 공군기지들을 공격하여 소련군 전투기 및 폭격기들이 이륙도 하기 전에 지상에서 완전히 파괴하여 제공권을 장악했다. 몇 시간 만에 66개 공군 기지에서 최소 1,200여 대가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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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도르 폰 보크]] 원수가 지휘하는 중부집단군은 2개 기갑집단군(2 및 3 기갑집단군)으로 구성되었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의 양쪽에서 동쪽으로 진격하여 [[민스크]]로 집중했다. 그들의 뒤를 2, 4, 9 군이 뒤따랐다. 민스크에서 합류한 독일군 기갑부대는 작전 개시 6일 동안 650킬로미터(400마일)을 질주하여 [[베레지나 강]]에 도착했다. [[7월 11일]]에는 [[드니프로 강]]을 도하하여 다음 목표인 [[스몰렌스크]]로 진격했다. 독일군은 순조롭게 [[7월 16일]]에 스몰렌스크에 도착했지만,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9월 중순까지 스몰렌스크에 붙잡혀 있어야 했다.
 
1기갑집단, 6군, 11군, 17군으로 구성된 남부집단군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의 지휘에 따라 [[갈리치아 (중유럽)|갈리치아]]를 지나 [[우크라이나]]로 진격하여 [[키예프]]에 집결한다는 작전 계획에 따라 진격하고 있었지만, 진격 속도는 다른 집단군에 비해 느렸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자원이 풍부한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남부 지역을 노릴 것으로 생각하고 군대를 남부 지역에 집중 배치하는 바람에 남부집단군은 이들을 물리쳐야 했던 것이다. 7월 중순에 [[키예프]]를 향하는 유일한 좁은 도로로 인해 진격 속도는 더디었다. 루마니아군 2개 군의 지원을 받은 11군은 [[베사라비아]]를 지나 [[오데사]]로 진격했고, 1기갑집단은 드니프로 강을 도하하여 키예프 동쪽까지 멀리 진격한 다음, 다시 키예프로 방향을 돌렸다. 1기갑집단과 키예프 남쪽에서 남부집단군의 다른 부대들이 [[우만 (우크라이나)|우만]]에서 합류했고,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하여 소련군 10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7월 중순에 [[키예프]]를 향하는 유일한 좁은 도로로 인해 진격 속도는 더디었다. 루마니아군 2개 군의 지원을 받은 11군은 [[베사라비아]]를 지나 [[오데사]]로 진격했고, 1기갑집단은 드니프로 강을 도하하여 키예프 동쪽까지 멀리 진격한 다음, 다시 키예프로 방향을 돌렸다. 1기갑집단과 키예프 남쪽에서 남부집단군의 다른 부대들이 [[우만 (우크라이나)|우만]]에서 합류했고,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하여 소련군 10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소련에서는 전쟁 초기 패전 책임의 희생양을 찾고 있었다. 이미 6월 말에 소련군 서부 전선 사령관 [[디미트리 파블로프]] 장군이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반역죄로 기소되어 총살당했다. 공군 서부 관구 사령관 코페츠 소장은 6월 22일 저녁에 이미 권총으로 자살했다.<ref> 리처드 오버리, 119쪽. </ref> 다른 한편으로, [[붉은 군대]]가 드니프르 강 및 [[서드비나 강|드비나 강]]을 건너 후퇴함으로써, 소련 지도부는 지역 내 중공업 시설을 모두 해체한 다음 다시 싸서 열차편으로 가능한 [[전선 (전쟁)|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중공업 시설은 [[우랄 산맥]] 너머 [[중앙아시아]]까지 아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전하여 재조립 및 설치된 후 가동에 들어갔다. 공장 가동에 필요한 기술자를 비롯한 민간인도 해체된 공장 시설과 함께 이주 조치되었다. 그러나 민간인 대부분은 산업 시설과 함께 소개되지 못했고, 알아서 동쪽으로 피난을 가든가 침략군의 자비에 목숨을 맡겨야 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파르티잔 부대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250만 명에 이르는 피난민이 동쪽으로 황급히 피난을 떠났다.<ref>리처드 오버리, 111쪽. 일부 자료에서는 23일로 표기된 경우도 있다.</ref>
 
소련에서는 전쟁 초기 패전 책임의 희생양을 찾고 있었다. 이미 6월 말에 소련군 서부 전선 사령관 [[디미트리드미트리 파블로프]] 장군이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반역죄로 기소되어 총살당했다. 공군 서부 관구 사령관 코페츠 소장은 6월 22일 저녁에 이미 권총으로 자살했다.<ref> 리처드 오버리, 119쪽. </ref> 다른 한편으로, [[붉은 군대]]가 드니프르 강 및 [[서드비나 강|드비나 강]]을 건너 후퇴함으로써, 소련 지도부는 지역 내 중공업 시설을 모두 해체한 다음 다시 싸서 열차편으로 가능한 [[전선 (전쟁)|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중공업 시설은 [[우랄 산맥]] 너머 [[중앙아시아]]까지 아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전하여 재조립 및 설치된 후 가동에 들어갔다. 공장 가동에 필요한 기술자를 비롯한 민간인도 해체된 공장 시설과 함께 이주 조치되었다. 그러나 민간인 대부분은 산업 시설과 함께 소개되지 못했고, 알아서 동쪽으로 피난을 가든가 침략군의 자비에 목숨을 맡겨야 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파르티잔 부대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250만 명에 이르는 피난민이 동쪽으로 황급히 피난을 떠났다.<ref>리처드 오버리, 111쪽. 일부 자료에서는 23일로 표기된 경우도 있다.</ref>
스몰렌스크 점령과 [[루가 강]] 진격과 함께, 중부집단군과 북부집단군은 첫 번째 주요 임무를 완료했다. 드비나 강과 브니프르 강 사이의 “육교”를 건너 장악하는 것이었다. [[모스크바]]로 가는 400킬로미터의 길이 열렸다. 독일군 장군들은 즉시 모스크바로 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들의 주장을 묵살했고,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와 중공업 시설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소련군 예비대가 중부집단군 남쪽 측면과 수렁에 빠진 남부집단군 사이의 [[고멜]]에서 집결 중인 사실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중부집단군 소속의 [[하인츠 구데리안]]의 2기갑집단을 남쪽으로 돌려 키예프로 진격하도록 하라는 명령이 문제가 되었다. 장군들은 모스크바 점령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중부집단군에서 2기갑군이 빠지게 되면 모스크바 점령은 힘들 것으로 예상되었다.
 
스몰렌스크 점령과 [[루가 강]] 진격과 함께, 중부집단군과 북부집단군은 첫 번째 주요 임무를 완료했다. 드비나 강과 브니프르 강 사이의 “육교”를 건너 장악하는 것이었다. [[모스크바]]로 가는 400킬로미터의 길이 열렸다. 독일군 장군들은 즉시 모스크바로 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들의 주장을 묵살했고,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와 중공업 시설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구데리안 장군의 2기갑군과 역시 본래 중부집단군 소속인 폰 바이크스 대장이 지휘하는 2군이 중부집단군으로부터 차출되어 남부집단군에 임시로 배속되어 키예프 북쪽에서 키예프를 공략하라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키예프 서쪽에서는 남부집단군 소속의 6군([[발터 폰 라이네하우]] 원수)과 17군,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기갑대장의 1기갑군이 투입되었다. 독일군은 6개 기갑사단, 자동차화사단 5개, 보병사단 35개 사단 총 36만여 명이 투입되었고, 소련군은 5개 군 35개 사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키예프 수비대 총사령관은 스탈린의 신임이 두터운 [[세묜 부됸니]] 원수였다.
 
스몰렌스크 점령과 [[루가 강]] 진격과 함께, 중부집단군과 북부집단군은 첫 번째 주요 임무를 완료했다. 드비나 강과 브니프르 강 사이의 “육교”를 건너 장악하는 것이었다. [[모스크바]]로 가는 400킬로미터의 길이 열렸다. 독일군 장군들은 즉시 모스크바로 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들의 주장을 묵살했고,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와 중공업 시설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소련군 예비대가 중부집단군 남쪽 측면과 수렁에 빠진 남부집단군 사이의 [[고멜]]에서 집결 중인 사실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중부집단군 소속의 [[하인츠 구데리안]]의 2기갑집단을 남쪽으로 돌려 키예프로 진격하도록 하라는 명령이 문제가 되었다. 장군들은 모스크바 점령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중부집단군에서 2기갑군이 빠지게 되면 모스크바 점령은 힘들 것으로 예상되었다.
[[8월 25일]], 키예프 공략전이 재개되었다. 구데리안의 2기갑군은 스몰렌스크와 키예프 중간의 [[포체프]]와 [[노브고로드]]를 점령한 후, 키예프 동쪽 롬나에 이르렀다. 남쪽에서는 클라이스트의 1기갑군이 드네프르 강을 도하한 뒤, 키예프 남동쪽에서 방어선을 구축하던 소련 38군을 격파하고 북쪽으로 진격했다. [[9월 11일]], 부데니 원수는 두 방면에서 독일군이 키예프를 포위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스탈린에 철수 허가를 요청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철수 허가 대신 부데니를 해임하고 키로포노스 대장을 새로운 사령관에 임명했다. 9월 14일, 키예프 수비대는 모스크바에 전선 유지가 불가능함을 보고했다. 한편 독일의 두 톱날은 9월 16일 키예프 동쪽 200킬로미터 지점인 [[로흐비차]](Lokhvytsia)에서 합류했다. 9월 17일에 철수 명령이 내려졌으나 때는 이미 늦었고, [[키예프 전투 (1941년)|키예프 전투]]는 [[9월 26일]]에 끝났다. 독일은 총 66만5천 명의 소련군 포로와 대포 3,718문, 전차 886대를 노획했다고 발표했다. 소련은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인정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는 발표하지 않았다.<ref> 〈밀리터리 리뷰〉, 2006년 5월호. </ref>
 
구데리안 장군의 2기갑군과 역시 본래 중부집단군 소속인 폰 바이크스 대장이 지휘하는 2군이 중부집단군으로부터 차출되어 남부집단군에 임시로 배속되어 키예프 북쪽에서 키예프를 공략하라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키예프 서쪽에서는 남부집단군 소속의 6군([[발터 폰 라이네하우라이나헤우]] 원수)과 17군,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기갑대장의 1기갑군이 투입되었다. 독일군은 6개 기갑사단, 자동차화사단 5개, 보병사단 35개 사단 총 36만여 명이 투입되었고, 소련군은 5개 군 35개 사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키예프 수비대 총사령관은 스탈린의 신임이 두터운 [[세묜 부됸니]] 원수였다.
 
[[8월 25일]], 키예프 공략전이 재개되었다. 구데리안의 2기갑군은 스몰렌스크와 키예프 중간의 [[포체프]]와 [[노브고로드]]를 점령한 후, 키예프 동쪽 롬나에 이르렀다. 남쪽에서는 클라이스트의 1기갑군이 드네프르 강을 도하한 뒤, 키예프 남동쪽에서 방어선을 구축하던 소련 38군을 격파하고 북쪽으로 진격했다.
 
[[9월 11일]], 부됸니 원수는 두 방면에서 독일군이 키예프를 포위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스탈린에 철수 허가를 요청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철수 허가 대신 부데니를 해임하고 [[미하일 키르포노스]] 대장을 새로운 사령관에 임명했다. 9월 14일, 키예프 수비대는 모스크바에 전선 유지가 불가능함을 보고했다.
 
한편 독일의 두 톱날은 9월 16일 키예프 동쪽 200킬로미터 지점인 [[로흐비차]](Lokhvytsia)에서 합류했다. 9월 17일에 철수 명령이 내려졌으나 때는 이미 늦었고, [[키예프 전투 (1941년)|키예프 전투]]는 [[9월 26일]]에 끝났다. 이 전투에서 키르포노스 대장은 전사하고 독일은 총 66만 5000명의 소련군 포로와 대포 3,718문, 전차 886대를 노획했다고 발표했다. 소련은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인정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는 발표하지 않았다.<ref> 〈밀리터리 리뷰〉, 2006년 5월호. </ref>
 
모스크바 점령을 목표로 한 [[태풍 작전]]은 [[9월 30일]]에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