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푸트니크 충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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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의 미 · 소의 관계 ==
1950년대 [[미국]]과 [[소련]]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자본주의진영과 공산주의진영. 곧, 두 냉전 세계의 중심축이었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을 비롯한 서방자본주의국가들은 소련을 미국에 대항할 만한 위협적인 존재로 느끼고 있지는 않았다. 세계대전 내내 나치를 주로 상대하던 소련이었지만 미국이나 영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버티기 어려웠다고 여겼던 것이다. 또한 처음으로 [[냉전]]이 [[열전]]으로 분출된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UN을 이끌고 가장 먼저 참전하였지만 소련은 [[북조선]]과 [[중화인민공화국]]에 무기를 대 주면서도 직접적인 충돌은 피했을 정도로 미국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당시 미국은 장거리 미사일과 같은 무기체계와 과학기술 전반에 걸쳐서 당연히 자신들이 앞서 있다고 평가하고생각하고 있었다.
 
== 스푸트니크의 발사 이후 ==
그런 와중에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했다. 이전까지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쇼프]]는 "[[수소폭탄]]을 실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진영은 단순한 체제선전용 허풍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련이 [[인공위성]]의 발사에 성공한 것이다. 이것은성공하자 미국을 비롯한 서방자본주의국가들에서방자본주의국가들은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받았다. 단지소련이 인공위성을세계 먼저최초로 쏘아올린인공위성을 것이쏘아올렸다는 문제가사실 뿐만 아니라, 대륙을 넘어설 수 있는 로켓 기술을 소련이 먼저 보유하면서,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의 선제공격을 가할 수도 있게 되었다는있다는 점이사실이 공포와 위기감을 준 것이다.
 
게다가 소련은 뒤이어 스푸트니크 2호의 발사에도 성공하는데, 여기에는 라이카(Lika)라는 개를 실어 쏘아올렸다. 즉 생명체를 성공적으로 쏘아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때 발사된 스푸트니크 2호의 무게는 500kg에 달했는데, 이것은 대용량의 수소폭탄을 실은 미사일을 쏘아올릴 만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도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자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1957년]] [[벵가드 위성]]을 쏘아올리기에 이른다. 그러나 1.6kg에 불과한 벵가드는 1m 정도 올라간 뒤 폭발하여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다 [[1958년]] [[익스플로러 1호]]의 발사에 성공(14kg가량)하면서성공하면서 어느 정도 자존심을 회복하게 된다.
 
==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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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국방부는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 개발 계획인 [[폴라리스 계획]]을 시작했다. 또한 폴라리스 개발을 위해 복잡한 프로젝트를 상호 관련있는 간단한 작업까지 분해하여, 그 전후 관계 등 관련 사항을 확인하고 작업 견적 및 관리 방법인 [[퍼트]](PERT)와 같은 [[프로젝트 관리]] 기법이 탄생하게 되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0년]] 선거 운동에서 미소의 "미사일 갭"을 묻는 질문에, 1,000기의 미니트맨 미사일을 비롯한 그 당시 소련이 보유하고 있던 것 이상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1961년]] [[5월 25일]] 특별 양원 합동 회의 석상에서 10년 이내에 인간을 달에 보낼 것이라고 선언하고, [[아폴로 계획]]의 목표를 달 착륙으로 변경하였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