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군 (왕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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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해오는 이야기 ==
=== 음주 사건 ===
보성군은 여러가지의 우여곡절과 시련을 많이 겪었다고 전해진다. [[1441년]](세종 23) 보성군에 책봉되고 [[1443년]] 숭덕대부(崇德大夫)에 올랐으나 [[1450년]](문종 1년) 술을 좋아하던 보성군이 술에 취하여 종실로서 품위를 손상하였다는 진언에 따라 보성윤으로 강등되었다. [[1457년]](세조 3) 단종이 죽자 그 대전관(代奠官)을 맡았고, [[1466년]] 해청위(海靑衛)가 되었다.
 
=== 남이와의 인연 ===
[[1467년]] 다시 보성군에 책봉되었으며, [[1468년]]에는 좌상대장(左廂大將)이 되었다. [[1468년]] 같은 해에 장군 [[남이]](南怡)를 국문하던 중 평소에 그와 교분이 두터웠던 사실이 드러나 아들 춘양군(春陽君)내(徠)와 함께 군호(君號)를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다. 이때 겪었던 고초의 후유증이 보성군에게 평생을 갔다고 전해진다. [[남이]]는 [[조선 태종|태종]]과 [[원경왕후]]의 외증손(外曾孫)이자 넷째 딸인 정선공주(貞善公主)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
 
"백두산의 돌을 칼 갈아 없애고(白頭山石磨刀盡)/두만강의 물은 말 먹여 없애니(豆滿江水飮馬無)/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안케 못하면(男兒二十未平國)/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부르리오(後世誰稱大丈夫)"에서 간신 유자광(1439 ~ 1512, [[무오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은 "男兒二十未得國"이라 고쳐 모함하여 25세에 공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던 장군 [[남이]]를 1468년(예종 1년) 11월 2일 겨우 26세의 나이에 마차에 묶어 사지가 찢겨나가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지는 참살을 겪게 하였다.
 
=== 기타 ===
그러나 보성군은 [[1469년]]에 풀려나 과거의 관직으로 복직되는 임명장을 받았다. [[1489년]](성종 20)에는 고령으로 83명의 노인에게 베푼 양로연(養老宴)을 받은 후 특별히 벼슬을 받아 흥록보성군(興祿寶城君)에 오르더니, [[1499년]](연산6)에는 종친의 최고품계인 정1품 현록대부(顯綠大夫)를 받고 같은해 [[9월 1일]]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1503년]](연산군 10)에는 왕이 이미 세상을 떠난 군을 생각하여 손자 강양정(江陽正) 견손(堅孫)에게 보성군을 대신하여 당상관(堂上官)을 제수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