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야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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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자객이 “こなくそ”라고 이요 사투리(아이치 현에서 사용되는 일본어의 방언)로 이야기 한 점에서, [[신센구미]]의 [[하라다 사노스케]]나 [[오이시 구와지로]]의 짓이라고 알려졌다. 당시, 오이시는 료마 암살죄로 살해당했다. 또한, [[메이지 시대]]가 될 때까지 신센구미가 했던 일이나 [[이케다야 사건]]등도 있어, [[보신 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신정부군은 신센구미에 대한 철저한 숙청이 이루어졌다.
 
이 사건에 관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많아, 아래 적혀있는 [[이마이 노부오]]설 외에도, 전혀 다른 속설인 [[사쓰마 번]]무사 설이나,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 (원제: 미부기시덴(壬生義士))』같은 해석도 있다.
 
또한, 현재 사카모토 료마의 지명도는 나카오카 신타로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아서, ‘사카모토 료마를 죽인 범인은 누구인가?’라는 배경으로 많이 논의되고 있지만, 당시 료마의 지명도는 그다지 높지 않았기 때문에, 나카오카가 암살범의 목적이며, 료마는 단순히 말려든 것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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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봉환]] 이후, 료마는 막부에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지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포함한 제후 회의에 의한 신정부 설립에 기울였다고한다. 무력 도막을 지지했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등이, 이런 료마의 움직임을 간과할 수 없었고, 고의로 막부측에 료마의 소재지를 누설했다는 설.
 
요시노부의 처우를 둘러싸고, 사이고와 료마의 의견이 서로 달랐다는 것은 확실하다. 무력 도막파에 의한 대정봉환파의 암살설은, [[사사키 다몬]]의 서한이나 오우미야 종업원들의 증언등의 자료를 근거로 두고 있다. 하지만 이 설은 대정봉환 노선과 무력 도막노선의 대립을 필요 이상으로 너무 강조되었으며, 양자는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노선은 아니었다는 학설<ref>[[이에치카 요시키]]『막말 정치와 도막운동』(요시카와코 문고(吉川弘文館), [[1995년]])[[다카하시 히데나오]]<‘공의정체파(公議政派)’와 사쓰마 도막파-왕정복고 쿠테타 재고->(『[[교토 대학]]문학부 연구 기요』41, [[2002년]]) [[사사키 스구루]]『막말정치와 사쓰마 번』(요시카와코 문고, [[2004년]])[[이노우에 이사오 (1940년)|이노우에 이사오]] ‘대정봉환 운동의 형성과정(一)’(『사학 잡지(史学雑誌)』81-11,[[1972년]])등 참고</ref>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점이 최대 문제로, 그 점에서 근거가 약하다. 이 설에는 일부 열광적인 지지자기 때문에<ref>막번(幕藩)측에서 그려진 일본 대하 드라마『신센구미!(新選組!)』나 [[TV 도쿄]] 신춘 와이드 시대극『료마가 간다 (竜馬が行く)』에서는 이 설을 기준으로 하여 료마의 암살을 그리고 있다. 시공경찰 PART4(時空警察 PART4)에서도 이 설을 기반으로 하여 료마의 암살범을 해설하는 등 TV, 소설 등에서는 이 설을 많이 채용하고 있고, 보통 이 설을 믿는 사람이 많은 경향이 보인다.</ref> 역사학계에서는 거의 상대하지 않는 실정<ref>사쓰마 번 음모설이 성립되는 것을 정치사적인 관점에서 논증하는 점에서 [[기리노 사쿠진]] ‘료마 조난사건의 새로운 시각 - [[가이엔타이]]무사 사사키 다몬의 서한 재검토 - 제 1회, 제 2회, 최종회’(『역사독본(歴史読本)』제 51권 제 10호, 제 51권 제11호, 제 51권 제 12호, [[2006년]])이 있다.</ref>이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