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형: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강씨매니아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류형'''(柳珩, [[1566년]] - [[1615년]])은 조선중기의[[조선]]중기의 무신으로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하였다.
 
== 생애 ==
조선중기의[[조선]]중기의 무신으로 본관 진주(晉州), 휘는 형(珩), 자는 사온(士溫), 호는 석담(石潭),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공조판서 [[류진동]](柳辰仝)의 손자이다. [[1566년]] 탄생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휘하에 들어가 강화도와 한강변 등에서 활약하였고, 이어 [[조선 선조|선조]]가 피란한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1566년]] 탄생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휘하에 들어가 [[강화도]]와 한강변 등에서 활약하였고, 이어 [[조선 선조|선조]]가 피란한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1594년]] 무과에 급제하여 남해현감이 되고,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李舜臣)의 막료가 되어 왜적과 싸우던 중 왜적의 총탄을 맞고도 적선에 돌진하여 싸우는 등 전공을 세워 부산진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에 특진되었다.
 
[[1594년]] 무과에 급제하여 [[남해시|남해]]현감이 되고, [[1597년]] [[정유재란]] 때 [[원균]](元均)이 패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삼도수군통제사|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막료가 되어 수군재건에 노력하였다. 남해 앞바다에서의 전투에서는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이순신]]의 곤경을 구하기도 하였다.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부상을 입고도 전사한 [[이순신]]을 대신하여 전투를 지휘한 사실이 왕에게 알려져 [[부산진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에 발탁되었다.
[[1600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가 되고, 이듬해 이순신이 맡았던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으며, 이어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09년]](광해 1) 이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겸 회령부사 거쳐 경상도, 평안도, 황해도의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이순신의 신망이 두터운 인물로 [[1600년]]에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으며, [[1602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다시 [[충청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함경도병마절도사]]로 [[회령부사]]를 겸하였다. 이어서 [[경상도병마절도사]]·[[평안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황해도병마절도사]] 재임중에 죽었다.
 
그는 용병(用兵)에 능하고, 특히 통제영(統制營)의 기계설비와 회령·경성의 축성 등 적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시설의 확립에 주력하였다.
[[1615년]] 죽은 뒤 해남(海南)의해남의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되었다제향되고,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가족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