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적십자·적신월 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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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만 해도 [[군대]]의 [[의료]] 체계는 [[군의관]]과 군인들을 위한 [[병원]]이 있는 현대 군대와는 달리, 미비한 점이 많았다. 또한 전장에서의 부상자들을 다룰 만한 안전하고 보호받는 기관도 존재하지 않았었다. [[1859년]] [[6월]] 경, [[스위스]]의 제분회사 설립자였던 [[앙리 뒤낭]]은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당시 [[프랑스]]의 점령지였던 [[알제리]]에서의 어려움을 호소하기 위해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를 알현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이탈리아]] 통일 전쟁 중이었는데, [[6월 24일]] 오후 [[솔페리노]]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한 그는 [[솔페리노 전투]]를 목격하게 됐다. 한 나절만에, 무려 30만 명 이상의 병사가 다치거나 전사하여 전장에 버려지는 것을 그는 목격하였다.
===인도주의적인 활동===
아래 문서는 영국 엑스터에서 만들고,중앙교육연구원에서 발행한역간한 앙리뒤낭 전기 p.46,47,48,49에 근거함.
====전쟁 시 활동====
=====이산가족 찾아주기=====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이란 이라크 전쟁]] 등의 분쟁이 있을 때마다 적십자사는 이산가족 찾아주기를 하였다. 실례로 적십자·적신월은 지금은 전산화되었지만[[전산]]화되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제2차 세계대전때에세계대전]]때에 카드색인시스템으로 [[이산가족]]을 찾는 일을 하였다. 그래서 포로들이 친구들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담뱃갑에 싸서 [[기차]]밖으로 던지면 누군가는 그것을 찾아서 적십자에 가져다주었다.
=====포로들과 시민들의 인권억압 감시=====
[[전쟁]]이나 [[혁명]]이 일어나면 [[포로]]들과 [[시민]]들은 [[인권]]을 억압받는다. 그래서 [[제네바조약]]에는 포로들의 [[인권]]을 억압하지 못하게 되어 있으며,포로수용소와 시민들의 구금시설은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에서 직접 현지를 방문하여 감시한다. 물론 이 때에는 불편부당한 활동을 위해 중립을 지키게 되어 있으므로 [[영세중립국]]인 [[스위스]] 사람들이 감시활동을 한다. 이러한 감시활동은 누구나 사람으로서의 가치와 [[권리]]를 존중받아야 한다는 [[인권]]의식에 근거한 활동이다. [[이란 이라크 전쟁]]때에 다친 포로들이 집으로 돌아간 것도 국제적십자의 활동에 의한 것이다.
=====민간인 보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민간인]]들이 [[학살]],강제이송,보복행위로 고통받는 일이 생기자 [[1949년]] [[제네바 회담]]을 시작으로 민간인들을 보호하는 운동이 시작되었다.그래서 적십자에서는[[적십자]]에서는 전쟁이 일어나면 민간인들을 보호하는 활동을 하는데,[[레바논 내전]]당시 적십자에서는 몇 달이나 고립당한 지역을 방문하여 [[여성]]과 [[어린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일을 하였다.
 
== 같이 보기 ==
* [[제네바 협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