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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 [[이탈리아 통일전쟁]] 때 제분회사의 수리권(水利權)을 얻고자 북이탈리아로 [[나폴레옹 3세]]를 찾아가던 길에, [[솔페리노 전투]]에서 생긴 수천의 부상자를 만나 국적에 구애없는 구호에 참가했다. 이때의 경험은 《[[솔페리노의 회상]]》([[1862년]])에 실렸는데, 이 책에서 앙리 뒤낭은 전시의 부상자 구호를 위한 중립적 민간 [[국제기구]]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 제안은 유럽 각국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아 [[1863년]]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창설되었고, 다음해인 [[1864년]] [[정치]], [[종교]], [[이념]]의 중립성 유지, 국적에 구애없는 구호활동을 원칙으로 하는 [[제네바 협약]]이 체결되었다.
=== 말년 ===
적십자활동을 하느라 부모가 물려준 유산을 포함한 전 재산을 모두 써버린 앙리 뒤낭은 [[1867년]] 고향인 [[제네바]]를 떠나 [[프랑스]] 파리에 이사하여 글을 옮겨적는 일을 하였다. [[1871년]] [[프랑스]]와 [[독일]]간의 [[보불전쟁]]이 벌어지자 앙리는 프랑스 국방위원회의 보조를 받으면서 구호활동을 하였다. [[1892년]]에는 [[스위스]]출신 [[의사]]의 배려로 알프스가 보이는 [[양로원]]에서 [[1910년]] 별세할 때까지 여생을 보냈다.이 시기에 앙리 뒤낭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음에도 마음의 평화를 누렸으며,[[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주의]] 사상을 주장하였다.[[1901년]] 박애정신과 평화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제1회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 기념 ===
'적십자 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며, [[1864년]] 뒤낭의 생일인 [[5월 8일]]을 [[세계적십자의 날|적십자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