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뮐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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캅 쿠데타가 발발후 뮐러는 다른 정부 인사들과 함께 슈트트가르트로 피한다. 바우어 연정이 해산된 3월 27일 뮐러는 제국총리가 되어 1920년 6월 6일까지 정부를 이끈다. 하지만 뮐러정부는 노조와 사민당 당원들의 "노동자정부"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는 독일민주당와 중앙당이 노조와 완전히 대립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제국의회의 정식 선거가 실시되기 전의 과도 정부이상의 역할을 했다. 그의 임기중 쿠데타의 영향으로 일어난 루어봉기와 중부독일소요를 진정시켰고, 우익 성향의 주민군을 해산시켰으며, 독립사민당까지 끌어들여 2차 사회화위원회를 도입했다. 또 그의 총리일 때 스파의 전쟁보상금회의가 임박해 있었고, 일시적으로 동맹군이 라인-마인 지역을 점령하기도 했다.
 
1920년 제국의회 선거는 바이마르 연정(사민당, 중앙당, 독일민주당)의 패배로 끝난다. 이 선거에서 뮐러는 프랑크지역 선거구에서 당선된다. 이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의원직을 유지한다. 동명이인 의원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던 뮐러-브레슬라우가 뮐러-프랑켄으로 바뀌게 된다. 독립사민당을 포함한 연정구성이 어려움을 격게 되면서 사민당은 야당이 된다. 뮐러는 1920년부터 1928년까지 사민당 원내대표를 지낸다. 그는 사민당의 정치적 선택지를 넓히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오토 브라운과 [[에두아르드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과 더불어 쾨어리츠 당대회에서 당시까지 연정대상에서 배제되었던 독일 민주당과의 연정수립이 가능하도록 한 결의안 채택도 그런 노력중의 하나였다.<ref>Heinrich August Winkler: Weimar 1918-1933. Die Geschichte der ersten deutschen Demokratie. München, 1993 163쪽</ref>
 
하지만 야당의 역할이 국가에 반대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뮐러에게도 명확한 사실이었다. 사민당 교섭단체는 콘스탄틴 페렌바흐 정부의 전쟁보상금 정책은 지지했지만, 국내 정치에 대해서는 비판을 했다. 뮐러는 사민당이 다시 집권할 의사가 있으며, 시대가 이를 요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