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뮐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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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20년 뮐러는 바이마르 국민의회 의원이 된다. 그리고 사민당 교섭단체의 지도부에 들어간다. 뮐러 1919년 6월에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버트]]와 샤이데만이 제국대통령과 제국총리에 취임하면서 오토 벨스와 함께 당대표로 선출된다. 역할 분담에 따라 뮐러는 원내교섭단체와 대외적으로 사민당을 대표하고, 벨스는 당조직을 담당하게 된다. 조직내에서 벨스가 뮐러보다 더 지지를 받았는지는 의심스럽다. 어떻든 뮐러는 보완적 인물이고, 연설이 뛰어나지 않고, 카리스마가 부족하지만 당내에서는 벨스보다 인기가 높았다.<ref>Heinrich August Winkler: Weimar 1918-1933. Die Geschichte der ersten deutschen Demokratie. München, 1993 335쪽</ref> 뮐러는 벨스와 더불어 1928년까지 당대표를 지낸다. 1922년에 아더 크르스핀이 추가로 당대표단에 합류한다.
 
1919년 여름 샤이데만 내각이 사임한 후 새정부를 구성하라는 에버트의 요구를 거부한다. 대신에 1919년 6월 21일부터 1920년 3월 26일까지 [[구스타프 바우어]] 내각의 외무부 장관을 역임한다. 외무부 장관을 하면서 중앙당의 요하네스 벨과 더불어 [[베르사이유 조약]]에 서명한다. 뮐러가 봤을 때, 조약의 조건은 실현불가능하지만 서명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 이후 조약 개정이 외교정책의 목표가 됐다. 외무부 내부적으로는 차관보 슐러가 제안한 조직개편안을 관철시켰다. 개혁안에 따라 영사업무와 외교업무가 통합되고, 외무직을 외부전문가에게도 개방되기 시작했다. 캅-뤼트비츠 쿠데타 참가자들에게는 오토 브라운과 더물어 뮐러는 "특히 악질"이었다.<ref>Heinrich August Winkler: Weimar 1918-1933. Die Geschichte der ersten deutschen Demokratie. München, 1993 118쪽</ref>
 
캅 쿠데타가 발발후 뮐러는 다른 정부 인사들과 함께 슈트트가르트로 피한다. 바우어 연정이 해산된 3월 27일 뮐러는 제국총리가 되어 1920년 6월 6일까지 정부를 이끈다. 하지만 뮐러정부는 노조와 사민당 당원들의 "노동자정부"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는 독일민주당와 중앙당이 노조와 완전히 대립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제국의회의 정식 선거가 실시되기 전의 과도 정부이상의 역할을 했다. 그의 임기중 쿠데타의 영향으로 일어난 루어봉기와 중부독일소요를 진정시켰고, 우익 성향의 주민군을 해산시켰으며, 독립사민당까지 끌어들여 2차 사회화위원회를 도입했다. 또 그의 총리일 때 스파의 전쟁보상금회의가 임박해 있었고, 일시적으로 동맹군이 라인-마인 지역을 점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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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제국의회 선거는 바이마르 연정(사민당, 중앙당, 독일민주당)의 패배로 끝난다. 이 선거에서 뮐러는 프랑크지역 선거구에서 당선된다. 이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의원직을 유지한다. 동명이인 의원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던 뮐러-브레슬라우가 뮐러-프랑켄으로 바뀌게 된다. 독립사민당을 포함한 연정구성이 어려움을 격게 되면서 사민당은 야당이 된다. 뮐러는 1920년부터 1928년까지 사민당 원내대표를 지낸다. 그는 사민당의 정치적 선택지를 넓히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오토 브라운과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과 더불어 쾨어리츠 당대회에서 당시까지 연정대상에서 배제되었던 독일 민주당과의 연정수립이 가능하도록 한 결의안 채택도 그런 노력중의 하나였다.<ref>Heinrich August Winkler: Weimar 1918-1933. Die Geschichte der ersten deutschen Demokratie. München, 1993 163쪽</ref>
 
하지만 야당의 역할이 국가에 반대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뮐러에게도 명확한 사실이었다. 사민당 교섭단체는 [[콘스탄틴 페렌바흐]] 정부의 전쟁보상금 정책은 지지했지만, 국내 정치에 대해서는 비판을 했다. 뮐러는 사민당이 다시 집권할 의사가 있으며, 시대가 이를 요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사민당이 [[요제프 비르트]] 정부(1920/21)와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정부(1923)에 참여했을 때, 뮐러 본인은 내각에 참여하지 않았다. 뮐러는 전 독립사민당 의원을 다시 사민당으로 끌어 들이는 데 집중했다. 그는 1923년 물가안정을 위해 8시간 노동제를 포기하는 것은 반대했다. 하지만 슈트레제만 내각의 재구성에 기여를 한다. 정부가 작센과 튀링엔의 좌파정부와 바이에른의 우익활동에 다르게 대응함에 따라 대연정을 파기하고 연정에서 철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