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언론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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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임시정부]]의 출범 이후 그는 일제의 눈을 피해 익명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에 후원금을 비밀리에 송금하였다. 그의 자금송금은 후일 [[안창호]], [[김구]] 등이 알게 되었다. 익명으로 임시정부에서 밀파한 독립단(獨立團)이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 중, 한번은 그의 서울 계동 자택에 어느 독립단이 찾아와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하였다. 그는 대답없이 자신의 금고문을 열고속을 뒤젹거리며 일부러 객에게 알린 뒤, 자신은 소변보고 온다 하고는 자리를 비켰다. 독립단원들은 품에 안을 만큼의 자금을 품은 뒤 사라졌다.
 
[[1919년]] [[4월]] [[김규식]]을 대표로 한 한국인 대표단이 [[파리강화회의]] 참여를 거부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는 분개한다. 이후 이상주의를 버리고, 이때의 이상이 좌절되면서 [[1919년]] 내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실력 양성만이 독립의 길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독립운동가]] [[이강훈]]은 [[동아일보]] 사장이던 [[송진우|고하]]는 [[김좌진]] 장군에게 3백 ~ 4백 명 규모였던 독립군의 무기구매와 훈련 등에 쓰도록 비밀리에 1만 원가량씩 네 차례나 군자금을 보내주었다고 하며 "동아일보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가 [[송진우|고하]]를 통해 보낸 것이지. 1만 원이라면 그때 황소 1백 마리를 사고도 남을 돈이었으니 요즘 돈으로 수억대의 큰돈이지."라고 말했다.<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0040100209114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90-04-01&officeId=00020&pageNo=14&printNo=21077&publishType=00010 광복회회장 이강훈옹「동아인연」70년 송진우사장이 거액 군자금] [[동아일보]] 1990년 4월 1일 14면 작성</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