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4번째 줄:
 
==개요==
인간병기로 길들여진 훈련병들 앞에서 기간병들은 손 쓸 틈도 없이 전체 24명 가운데 18명이 희생당하고 6명만이 살아 남았다. 이것이 [[1971년]] [[8월]] [[23일]] 6시경의 일이다. 기간병들을 살해한 북파부대원 24명(본래 31명 중 7명은 [[훈련]] 기간 중 [[사망]])은 12시 20분경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 뒤, 시내버스(현대 R192)를 빼앗아 서울로 향하였다. 이어 인천에서 육군과 총격전을 벌인 뒤 버스가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두 번째 버스(신진 FB100L, [[태화상운]] 소속 [[수원]]-[[인천]]간 시외버스)를 탈취해 14시 15분경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건물 앞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마지막 총격전을 벌이다 스스로 수류탄을 터뜨려 부대원 대부분이 죽고, 4명만이 살아 남았다. 생존자 4명은 [[1972년]] [[3월]] [[10]]일 사형당하였다.
 
정부는 이 사건을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규정하였는데, 이후 이 사건의 진상은 갖가지 의문점을 간직한 채 30여 년간 베일에 싸여 있었다. [[684부대]]의 훈련병들이 겪은 3년 4개월 동안의 실상을 파헤친 백동호의 소설 《실미도》(1999[[1999년]])와 이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강우석 감독의 동명영화([[2003년]] [[12월]] 개봉)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2004년[[2004]]년 초에는 [[1968년]] [[3월]] [[충청북도]] [[옥천군]]의 한 마을에서 실종된 7명의 청년이 [[684부대]]원이었다는 사실이 [[국방부]]에 의해 확인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684부대]]의 구성원들이 [[범죄자]]들이었는지, 아니면 [[민간인]]들이었는지를 비롯해 많은 점들이 아직도 의문에 싸여 있다.
 
==같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