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기데온 폰 라우돈 남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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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HGM L Allemand Gideon von Laudon Kunersdorf.jpg|thumb|left|쿠너스도르프 전투의 전장에서 라우돈의 모습.(빈 군사사 박물관).]]
1745년 실레지아(Silesian) 산맥에서 트렌크의 지휘하에 묵묵히 근무하며 경장부대를 이끌고 전역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라우돈은 또한 [[조르 전투|수어]](Soor)에 참전했다. 비정규군에 있을때 동료들이 보인 무법적인 성향을 혐오한 그는 그 때문에 잠시 은퇴를 고려했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정규
1758년 전역에서 총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행동한 그에게 첫 기회가 찾아왔다. 그의 활약에 의해 프리드리히 대왕은 [[올로모우츠]](Olomouc)의 공성전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보헤미아로 퇴각하고 말았다([[돔마소프 전투]], 6월 30일). 그는 [[호크키르히 전투|호크키르히]](Hochkirch)의 전역에서 지휘에 도전하여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중급 육군 원수(lieutenant-field-marshal)의 지위에 오르는 보상을 받았다. 라우돈은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녀의 남편 황제 프란시스에게서 신성로마제국의 귀족이자 오스트리아 귀족인 [[프라이헤르]](Freiherr)를 수여 받았다. 또한 더 나아가 보헤미아의 [[쿠트나호라]](Kutná Hora) 근처 소유지를 보유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대 십자가 훈장과 함께 그에게 소유지를 선물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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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Wien Maria-Theresien-Denkmal Gideon Ernst von Laudon.jpg|thumb|right|[[마리아 테레지아]]광장에 있는 에른스트 기데온 폰 라우돈의 기마상]]
라우돈은 러시아의 명령을 받는 조건으로 연합하는 오스트리아군 지휘관이 되어 [[쿠너스도르프 전투|쿠너스도르프]](Kunersdorf)에 참전해 [[표트르 살티코프]](Pyotr Saltykov)
1761년 그는 행동을 재개해 평소처럼 실레지아에서 그의 러시아 동맹과 함께 쿠너스도르프 이후 소심해져 [[분첼비츠]](Bunzelwitz)의 프리드리히의 참호로 에워쌓여진 진지를 발견하고, 그걸 상대로 모든 시도를 해보았으나 실패했다. 1761년 9월 30일/10월 1일 밤에 있었던 [[슈바이드니츠]](Schweidnitz) 급습은 찬란한 공적에 비해 그의 하나의 덧없는 호기였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행동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어져 다운과 라시의 임시변통적인 전략과는 눈에 띄게 달랐다.
7년 전쟁의 이후 전역을 공부한다면 아마 다운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침략력(aggressiveness)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라우돈이란 천재와 한 쌍을 이루는 것을 경계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오스트리아 군에서 이들을 가리켜 부르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파비우스]]"(Fabius)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마르켈루스]]"(Marcellus)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어진 충돌은 전쟁이 끝나는 마지막 3년 동안
==이후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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