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익: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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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촉한이 조위에 병탄되자, 남방을 보전하다 귀순하여 전임을 그대로 맡았다. 《한진춘추》에는 이 무렵의 일이 더 기록되어 있다. 곽익은 조위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성도로 가고자 했으나, 조정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침내 성도가 무너지자, 소복을 입고 곡했다. 여러 장수들이 속히 조위에 귀순하기를 청했으나, 황제의 안위가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항복하지 않고 있다가 황제가 동쪽으로 갔음을 듣고 남방 6군을 거느리고 항복했다. [[사마소]]는 이를 좋게 여기고 곽익을 남중도독으로 임명하여 이전의 직무를 그대로 행하게 했다. 나중에 [[오 (삼국)|오나라]]의 교지태수 손서를 죽이고 위나라에 귀부한 여흥(呂興)을 도와 교지, 일남, 구진 3군을 평정하고, 열후에 봉해졌다.
 
여흥이 공조 이통에게 죽임을 당하자 [[서진 무제]]는 여흥의 후임으로 건녕 사람 찬곡(爨穀)을 태수로 삼았으나 죽었고, 다시 파서 사람 마융(馬融)으로 태수를 삼았으나 또 병사했다. [[태시 (서진)|태시]] 4년([[268년]]), 곽익은 건위 사람 양직(楊稷)으로 마융을 대신케 하고, 장군 모경(毛炅), 구진태수 동원(董元) 등을 보내, 교지를 치러 온 오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오나라의 교주자사 유준(劉俊)과 전부독 수칙(脩則)을 죽였다. 곽익은 저희를 파견하면서 “성이 포위된 지 100일 내에 항복하면 너희의 가속이 주살될 것이다. 그러나 100일을 넘겼는데도 구원하지 않으면, 내가 죄를 받겠다.”라고 약속했다. 태시 7년([[271년]]), [[우사 (동오)|우사]]와 [[도황]]이 교지를 무너뜨릴 때에는 곽익이 이미 죽고 없어 구원할 수 없었다.
 
[[분류:생년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