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난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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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키류마루와 탄약 약탈 사건 ===
1월 29일 정부는 가고시마 현에 있는 육군성 포병에 속한 창고에 있는 무기, 탄약을 [[오사카]]로 이동하기 위해, 비밀리에 세키류마루(赤龍丸)를 가고시마로 파견하여 반출하였다.
이 반출은 당시 일본 육군의 주력 장비였던 [[스나이더 총]]의 탄약 제조설비를 오사카로 반출하는 것이 주목적이었으며, [[일본 육군성|육군성]]의 조슈 파벌과 사쓰마 파벌의 대표자 [[야마가타 아리토모]], [[오야마 이와오]]가 협력하여 이루어진 일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일본 육군은 스나이더 총을 주력 장비로 채용하였지만, 그 탄약을 사쓰마 번이 설립한 병기, 탄약 공장이 전신인 가고시마의 공장에서 제조되어, 거의 독점적으로 공급하고 있었다.
 
후장식 스나이더 총을 재빨리 도입하여, 슈세이칸 사업<ref>集成館事業, 사쓰마 번 당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에 의해 일어난 일본 최초의 양식 산업군의 총칭</ref>의 축적으로 근대 공업 기반을 지니고 있던 사쓰마 번은, 영국에서 설비를 수입하여 메이지 5년 육군성 설치 이전부터 스나이더 탄약의 국산화에 성공한 유일한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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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약, 탄약, 뇌관만 있으면 사용할 수 있었던 전장식 총과는 달리, 후장식 스나이더 총의 탄약([[실탄]])은 놋쇠를 주재료로 하여 수압 프레스로 성형된 토대 [[탄피]]가 불가결했으며, 이것이 없으면 총의 기능을 발휘 할 수 없었다.
 
탄피 토대는 단순한 구조였기 때문에, 개인 레벨의 소규모 양만 있으면 가내 생산으로 제조할 수 있었지만, 소규모라 해도 군이 전투에서 사용하는 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전용 대량 생산 설비가 필요했으며필요하며, 그 정도 설비는 당시의 일본 내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공업 기반의 유무도, 한 지방에 불과한 가고시마와 중앙정부의 힘 관계를 균형지은 주요인 중 하나였다.
 
또한, 구 사쓰마 번 무사의 심정으로, 가고시마 창고의 화약, 총알, 무기, 제조 기계류는 번 무사가 갹출한 돈으로 만들거나 구입한 것으로 유사시에 필요한 경우, 번의 무사나 그 자손이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된 점도 있어, 사학교 학생은 중앙정부가 도둑처럼 사쓰마의 재산을 반출한 것에사실에 분노한분노하였고 그와 동시에, 예상되는 충돌에 대비한 무기, 탄약을 입수하기 위해, 밤, 소모타(草牟田)화약 창고를 습격하여 총알,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 밤 이후, 연일 각지의 화약 창고가 습격당해, 세간에서 말하는 ‘탄약 약탈 사건’이 일어났지만, 사학교 학생이 입수한 것은 야마가타와 오야마가 중요시하지 않았던 구형의 [[엔필드 총]]과 그 탄약뿐이었다.
 
스나이더 탄약의 제조설비를 잃은 것은, 사쓰마를 상징하는 신병기였던 스나이더총의 무용지물을 의미하며무용지물과 이미 구식화된 전장식의 [[엔필드 총]]으로 싸워야 한다는 점을 의미하며, 후장식과 전장식의 연사속도의 차이가연사속도차가 초래하는 결정적인 전력차를 [[보신 전쟁]]에서 종군한 사이고를 비롯한 많은 사쓰마 사족들은, 직접 체험함으로써체험하여 잘 이해하고 있었다.
 
=== 사이고 암살 계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