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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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 유엔감시하의 한반도 자유선거 실시를 가결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11월 24일]] [[김구]]는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발표했다가 [[11월 30일]] 이승만을 방문한 뒤 번복하여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였다. 김구의 방문을 받고 한시간여 요담을 한 후, [[김구]]는 자신과 이승만은 조금도 근본 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고 사실상 단독정부 참여 의사를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김구의 성명 발표 후 이승만은 [[김구]]와 함께 [[서북청년단]] 1주년 기념식에 참석회 훈화를 하였다.<ref name="강준만1940-2"/>{{Rp|65}} 그러나 협력관계가 강화되어 가던 12월 2일 발생한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둘의 관계는 파국으로 가게 되었다.
 
[[1947년]] [[12월 2일]] [[김구]]는 [[장덕수]]암살 배후로 지목되어 [[미군정]]에 소환당했다. [[김구]]는 이승만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ref name="강준만1940-2"/>{{Rp|67~68}}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를 방관하면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배신감에 크게 분노하였다.<ref name="강준만1940-2"/>{{Rp|67~68}}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이승만에 대한 지지를 거두고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김구의 항의로 이승만의 민족대표단은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 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 결별하게 되었다.<ref name="강준만1940-2"/>{{Rp|67~68}}
[[1948년]] [[3월 8일]] 이승만은 언론에 장덕수의 사건에 김구가 연루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부하 몇사람 행동이 김구에게 누가 끼친 것은 유감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인용문|"고 장덕수씨 사건에 김구가 관련되었다는 말은 얼마 전에 들었으나 근일 항간에 허무한 풍설이 많이 유포되고 있는 때이므로 나는 별로 신뢰치 않았던 것인데 지금에 와서는 신문에까지 보도되고 있는 때이므로 나로는 사실을 모르고 좌우간 단언할 수 없으나 김 주석이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 김주석 부하 몇 사람의 무지망동한 죄범으로 김 주석에게 누가 미치게 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앞으로 법정의 공정한 판결이 있을 줄 믿는다."<ref name="아 비운"/> {{Rp|331}} }}
 
이승만은 [[장덕수]]의 암살범을 김구라고 확신했고, [[경교장]] 측에서 지원, 구명 요청이 왔으나 모두 거절한다.
 
=== 단독 총선거 직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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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2월 2일]] 특별 담화문 「반민법 실시에 대하여」}}
 
반민족행위 처벌법안이 발의되자 친일파들은 국회와 서울 시내에 협박장을 뿌렸다. 내용은 "민족 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다."라는 것이었다. 이승만도 이에 동조하여 "친일파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한 것은 공산당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친일청산을 빨갱이와 연관시켰다.<ref>[ http://media.daum.net/society/view.html?cateid=1067&newsid=20100823114419523&p=sisain 시사INLive 2010.08.23 '친일'은 지금도 계속된다]</ref>
 
결국 반민특위는 해산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국회 프락치 사건]]과 6.6 특경대 습격사건등이 결정적이었다. 이는 당시 내무차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장경근]]의 지시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반민특위 특경대 해체에 결정적인 권한을 내린 사람은 이승만이었다.<ref name="미완의 역사, 친일청산 - 반민특위 김상덕">[http://www.kbs.co.kr/end_program/1tv/sisa/manhistory/vod/1334585_968.html “미완의 역사, 친일청산” - 반민특위 김상덕] 내용中..</ref>
{{인용문2|내가 특별검찰대를 해산시키라고 경찰에게 명령한 것이다... (중략)... 특별 검찰대는 국립경찰의 노련한 경찰관이자 반공투사인 [[최운하]] 등을 체포하였는데....(중략)..현재, 특위에 의한 체포의 위협은 국립경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br />
-[[1949년]] [[6월 8일]] AP통신사와의 회견中.}}
이때문에 반민특위 특경대는 '친일파들과 결탁한 이승만 정권의 탄압'<ref name="조중동, 친일인명사전이 그렇게도 두려운가">[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1961597 조중동, 친일인명사전이 그렇게도 두려운가]</ref> 에 의해 해산되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친일파 포용은 민족문화의 정상적 발전을 저해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남게 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11 />
 
===== 내각 인선 작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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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전쟁 (1950 ~ 1952) ====
{{참조|한국 전쟁}}
<!--이하에서는 한국 전쟁 시기에 이승만 대통령의이승만의 개인적 행적을 위주로 컨텐츠를 구성하고, 그외의 사항은 한국 전쟁 문서에서 다루는 것이 타당함.-->
[[파일:Syngman Rhee.jpg|thumb|200px|[[1951년]]의 이승만 대통령]]
[[파일:Syngman Rhee 2.jpg|thumb|200px|한국 전쟁 중 이승만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북괴군의 선제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 대통령은이승만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 그러나 국민들이 전혀 모르고 있던 상황에서 북괴군이북한군이 미아리 고개까지 쳐들어 오자 그 때서야 국민들은 대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부는 북괴군이북한군이 [[한강]]을 넘어서 진격할 것을 우려해 [[한강철교]]를 폭파했다. 한강 철교의 폭파는 [[신성모]]국방장관이 지시했지만, 총리 [[이범석 (1900년)|이범석]]이 한강 철교 폭파 건의하였다는 주장도 있다.<ref>백사 이윤영 회고록 제I편 171~172쪽</ref> 지금까지도 정부의 이 같은 실책을 비판을 받고 있다. 북한군을 곧 격퇴할테니 피란가지 말고 안심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이승만의 라디오 방송을 믿었던 서울시민들은 한강 철교의 폭파로 남쪽으로 가지 못 하게 되었고 [[북괴군조선인민군]]은 서울을 넘어 [[부산]], [[포항]]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피란가지 말라고 라디오 방송할 때 이승만 대통령은이승만은 대전으로 피신해 있었다.
 
피란가지 못한 수많은 서울시민들은 북한군에 의해 강제동원되었는데, 전쟁 후에는 북한군에 부역하였다고 감시받고 공무원이 되지 못하고 여권을 발급받지 못하는등 수십년 동안 고초를 겪었다.{{모호}}{{출처}}
이 무렵에 '대국민 사상통제 목적'으로 조직된 반공단체인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조선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부역행위 등 협조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이[[김창룡]]의 CIC 특무 헌병대에서'인민군 점령 수중에 들어가지않은 지역'에 보도연맹원들을 잡아 처형하도록 명령했다는 설이 있다. 이를 [[보도연맹사건]]이라 한다.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 가운데 실제 공산주의자가 아닌 관리들의 실적을 위해 문서에 기록되거나 배급타먹기위해 가입한 양민들도 있었다. 현재 보도연맹원 처형자들에 관해 발굴조사를 진행 중이다.
 
이 무렵에 '대국민 사상통제 목적'으로 조직된 반공단체인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조선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부역행위 등 협조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그래서 이승만이승만은 대통령이[[김창룡]]의 CIC 특무 헌병대에서헌병대에 지시하여 '인민군 점령 수중에 들어가지않은 지역'에 보도연맹원들을 잡아 처형하도록 명령했다는 설이 있다명령했다. 이를 [[보도연맹사건]]이라 한다.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 가운데 실제 공산주의자가 아닌 관리들의 실적을 위해 문서에 기록되거나 배급타먹기위해 가입한 양민들도 있었다. 현재 보도연맹원 처형자들에 관해 발굴조사를 진행 중이다.
한때 이승만은 [[일본]] [[야마구치 현]]에 망명정부를 설치하는 방안도 세우고 있었다.<ref name="야마">[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6041470133 일 산케이신문, "50년 일본 야마구치에 이승만, 망명정부 구상"] 조선일보 1996.04.14</ref> 정권 관리들은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 수립의사를 일본에 전달했으며, 일본 정부는 야마구치현 지사 다나카에게 6만여명을 수용할 시설 및 식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했다 당시 다나카 지사는 현의 소학교를 망명정부 시설로 확보하는 방안과 일정부에 대해 특별 식량배급요청 여부를 검토하기도 했다.<ref name="야마"/> 1950년 6월27일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미대사에게 문의해왔고 이는 그대로 미 국무성에 보고되었다.<ref name="야마"/>
 
한때 이승만은 [[일본]] [[야마구치 현]]에 망명정부를 설치하는 방안도 세우고 있었다.<ref name="야마">[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6041470133 일 산케이신문, "50년 일본 야마구치에 이승만, 망명정부 구상"] 조선일보 1996.04.14</ref> 정권 관리들은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 수립의사를 일본에 전달했으며, 일본 정부는 야마구치현 지사 다나카에게 6만여명을 수용할 시설 및 식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했다 당시 다나카 지사는 현의 소학교를 망명정부 시설로 확보하는 방안과 일정부에 대해 특별 식량배급요청 여부를 검토하기도 했다.<ref name="야마"/> 1950년 6월27일 이승만 대통령은이승만은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미대사에게 문의해왔고 이는 그대로 미 국무성에 보고되었다.<ref name="야마"/>
 
[[한국전쟁]] 휴전 후 [[국회의장]] [[신익희]], 국회부의장 [[장택상]], [[조봉암]]은 이승만을 찾아가 '수도 서울을 지키겠다고 약속해놓고 약속을 위반하고 도주한것에 대한 대국민사과를 발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내가 [[당 덕종]]이냐면서 거절했다. 그래도 [[조봉암]]은 끝까지 이승만에게 국민앞에 사과하라고 요구하자, 이승만은 제스처를 하며 '다 과인이 부덕한 탓이오 이럴까?'하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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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ung Il gwon&Syngman Rhee.jpg|thumb|left|200px|[[한국 전쟁]] 참전군인 위문 순찰 중 [[정일권]]과 함께]]
{{본문|1·4 후퇴|국민방위군 사건|포로 교환 문제|거창양민 학살 사건}}
[[1951년]] [[1월 4일]]에 [[중공군중화인민공화국]]이 궁지에 몰린 북괴군을북조선을 도와주자 예상치 못한 반격에 국군과 유엔군은 200만 중공군을 상대로 후퇴하였다. 이때 중공군이 다시 [[서울]]을 점령하에 따라 전쟁을 원점으로 돌아갔고, 미군이유엔군과 주축이된이승만 유엔군은대통령은 북쪽 땅인 [[원산]] 등 기타 지역에 폭격을폭격이 가했다일어났다. [[1월 12일]] 일본군의 참전설이 나오자 이승만 대통령은이승만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였다. [[2월]] 38선은 북괴군의공산군의 남침으로 이미 없어진 것이므로 북진 정지는 부당하다고 선언하였으며 2월 15일 북진통일을 전쟁 목표로 분명히 밝히고 미국에도 통보하였다. [[3월 24일]] 한만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 정전은 안 된다고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53년 6월 전국적으로 벌어진 휴전반대 시위는 당시 휴전협정에 대한 국민감정을 말해주고 있었다.<ref>백선엽,《군과 나》 (시대정신, 2009) 328페이지~ 329페이지</ref>.
 
[[6월 9일]] 38선 정전의 결사반대를 선언하였고 [[6월 27일]] 소련의 정전안을 거부하였다. [[9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은이승만은 휴전수락의 전제조건으로 중공군 철수, 북한 무장해제, 유엔감시 하 총선거를 요청하였다.
[[1950년]] [[12월]] [[미국]]에 체류중인 [[장면]]을 [[국무총리]]로 내정하였다. 당초 이승만 대통령은이승만은 [[장면]]에게 인사권을 위임하겠다고 하였으나, "5석 중 3석을 총리가 정하였으니 내무에는 [[이순용]], [[국방부|국방]]에는 [[이기붕]]을 써 주시오"하고 종용하자 [[장면]]은 받아들이고 말았다.<ref>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증보판) 436페이지</ref> [[한국 전쟁]] 중 2년 동만 이렇다 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중국의 개입으로 전선이 고착화하자 미국은 현상유지 차원에서 휴전을 서둘렀다. [[미국]]은 [[소련]] 및 [[중공]] 측과 휴전을 논의한다. 1952년 3월 이승만 대통령은이승만은 분단 상태에서의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며, “민족국가로 생존하기 위해 단독으로라도 계속해 싸워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ref>[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6/08/14/200608140500031/200608140500031_1.html 북진통일 위협과 미국의 이승만 제거작전]- 신동아</ref> [[1953년]] [[7월 27일]]에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한국 전쟁 휴전으로 매듭을 지어졌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은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지향하는 동안 이면에서는 휴전시에도 미국의 원조를 최대한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외교력을 발휘하여고집하며 휴전에 협조하지 않았다. 휴전 협정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 서울에 올라왔다.
 
[[한국전쟁]] 휴전 후 [[북조선]]과의 재충돌을 우려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한의 안전보장을 담보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미국에 요구하였다. [[중공]]의 개입으로 부담스러워한 [[미국]]은 휴전협정을 추진하였다. 이에 반대한 이승만은 휴전 협정을 방해할 목적으로 수감된 포로들 중 [[반공포로]]들을 대규모로 석방했다.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에 격분한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할 작전을 계획한다.
[[한국전쟁]]을 [[중공]]의 개입으로 부담스러워한 [[미국]]은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열린 제 1차 휴전회의를 시작하였으며, 1953년 한국전쟁 휴전을 선거공약으로 한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에 반대한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6월 18일 휴전 협정을 방해함과 동시에 휴전시 미국의 최대한의 원조를 이끌기위한 목적으로 수감된 포로들 중 [[반공포로]]들을 대규모로 석방했다.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에 격분한 미국은 1단계, 이승만 대통령에게 장기 상호방위조약, 20개 사단에 대한 군사 원조 및 경제원조를 약속하여 휴전동의를 종용하고, 여의치 않을시 2단계인 미군 및 다방위의 지원철회에 대한 위협과 실패할 경우, 3단계인 쿠데타를 조종해 이승만 대통령을 축출하는 '에버레디작전(Operation Everready)'을 계획한다.<ref>백선엽,《군과 나》 (시대정신, 2009) 336페이지</ref>. 그러나 반공포로 석방은 대한민국을 휴전협상에서 철저히 배제했던 미국이 대한민국과의 휴전 후 계획에 대한 지원과 원조협상을 이끌어내는 1953년 6월 25일 부터 18일간 미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 로버트슨(Walter Robertson)특사와의 회담에서 1.상호안전보장조약의 체결, 2. 최초 2억 달러의 원조자금 공여를 비롯한 장기 경제원조에 대한 보증, 3.한미 양국정부는 휴전 후 정치회담에서 90일 이내에 실질적 성과가 없을 경우 정치적 회담 중단, 4.계획 중인 한국군 확장에 대해 육군 20개 사단과 상응하는 해군 및 공군 설치승인, 5.정치회담에 앞서 공동 목적에 대해 한미 간 정상회담 개최. 라는 휴전 후 대한민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에 대한 확답을 이끌어내는 외교력을 발휘하였다.<ref>백선엽,《군과 나》 (시대정신, 2009) 334페이지</ref>.
 
==== 6.25 전쟁의 후유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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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이승만은 당시 자신을 황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영친왕등의 실제 황실의 후손에게는 '황족'이라는 칭호를 쓰지 말 것이라는 경고까지 날릴 정도로 냉대했었다.
[[1950]]년에 이승만은 맥아더와 면담 때, 최초로 영친왕 부부를 만났다만났고, 이때부터 이승만은 이들을 자신의 정치적인 눈엣가시로 여기게 되었다.
 
법 제정 후:황실 후예들은 해방 후 이승만 정권 때 만든 "구황실 재산 처리법"으로 모든 재산과 권력을 빼앗기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대한제국 순종|순종]]황제의 계비인 윤황후는 6·25 때 피란을 다녀온 뒤 그가 살던 낙선재로 돌아가지 못하고 정릉의 한 집에서 살았다귀양살이처럼 살기도 했다. 이 때 당시, [[영친왕]]은 일본에 있던 사저마저 한국 정부가 내놓으라고 하자, "내 나라, 내 정부를 상대로 소송할 순 없다"며 소송 내기를 거절했다.{{출처}}
 
이후, 몰수한 재산은 이승만 자신의 정치적 자금으로 사용 되었다고 한다.{{출처}}
법 제정 후:황실 후예들은 해방 후 이승만 정권 때 만든 "구황실 재산 처리법"으로 모든 재산과 권력을 빼앗기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대한제국 순종|순종]]황제의 계비인 윤황후는 6·25 때 피란을 다녀온 뒤 그가 살던 낙선재로 돌아가지 못하고 정릉의 한 집에서 살았다.
 
===== 사사 오입 개헌과 3대 대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