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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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받고 날조하십니가. 진짜 뉴또라이트 놈들이 만든 교과서는 이모양입니까, 사실외곡 작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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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盧武鉉 政府, 2003년~2008년)는 [[대한민국]]의 [[제6공화국]]의 네 번째 정부이다. '''참여정부'''(參與政府)는 노무현 정부의 별칭으로 언론에서 자주 쓰인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4&aid=0000052791 [새정부 별칭 '참여정부' 의미는<nowiki>]</nowiki> 盧당선자 국정철학 반영], 《파이낸셜 뉴스》, 2003년 2월 10일.</ref> 참여정부는 [[200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제16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노무현]]의 취임과 함께 [[2003년]] [[2월 25일]]에 출범하여 [[열린우리당]]이 여당이 되었고 [[2008년]] [[2월 24일]]에 종료되었다. [[2004년]] 6월 17대 국회는 헌정사상 최초로 개혁진영이 의회권력을 장악하면서 출범부터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적 기대를 모았다. 입법부 권한 강화를 위한 노력이 이어졌으나 [[4대 개혁 입법]] 추진을 놓고 여야간 대립이 격화되면서 잦은 공전사태를 비롯해 4년 내내 정쟁으로 얼룩졌다. <ref name=autogenerated1>[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3&aid=0002113892& 17대 국회 결산 - 성과와 한계]</ref>
 
[[노무현]] 정부는 국정 목표로 국민들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 발전 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아]] 시대 등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임기내내 [[한나라당]]을 비롯한 야당과의 갈등으로 대통령이 임기중 탄핵되는 사태를 야기하였고, 임기말 측근 비리와 [[바다이야기]] 사건, 나라종금, 썬앤문, 장수천 주가 조작 사건과 [[신정아]] 로비 라인 등의 부패 사건이 연이어 터졌으며 한미 FTA 타결 문제를 놓고도 사회적인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 명칭의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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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복지, 여성 ==
'참여복지'라는 정책기조를 통해서 국민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복지정책을 표방하였다.
'참여복지'라는 정책기조를 통해서 국민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복지정책을 표방하였다. 2005년 인화학교 교직원들이 청각장애인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사건이 알려졌다. 당시 최시문 인화학교 교사는 시교육청 교육부에 탄원서를 보내는 등 이를 알리려고 동분서주 했지만 관계기관의 반응은 냉담했다고 말했다. 김영진 민주당의원은 "인화학교 사건을 보며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242일간 농성 등 온몸으로 항거할 때 교과부, 교육감이 사실상 아무런 조치를 안했다"고 지적했다 당시 인화학교 대책위는 2006년부터 2007년까지 242일간 천막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오히려 업무방해, 집단행동 등의 이유로 파면, 해임 등 대량 징계를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5293155 교과위 국감 '인화학교' 최대 이슈]</ref>
 
=== 독립운동가 서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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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
 
== 환경 ==
공론화를 거치지 않은 참여정부의 정책 추진(관리지역내의 공장설립면적 폐지, 수도권내 공장 신·증설 허용, 전국 [[골프장]] 230개 건설 및 대폭적인 규제 완화, [[기업도시]] 특별법 제정 추진, 경유상용차 배출가스 기준 유예조치 등)에 반발한 환경단체들이 [[2004년]] [[11월 10일]] '환경비상시국'을 선언하고, [[새만금]], 핵폐기장, [[천성산]]·[[금성산]] 관통 고속철도, [[경인운하]], 대형댐 건설 등의 대형국책사업의 재검토를 요청하였다.<ref>[http://www.jejusori.net/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4771 "盧 대통령 개발정책, 개발독재 때보다 더 위험"], 《제주의 소리》, 2004.11.10. </ref><ref>[http://www.koreaenv.org/rush/why2.html 더 깊숙한 개발주의로 빠져들고 있는 참여정부], 환경비상시국회의</ref> [[2006년]] 2월에 민·관 환경정책협의회가 구성되었다.
 
== 측근들의 비리 ==
=== 사돈 배병렬의 권력형 비리 의혹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돈인 배병렬(62) 전 NH-CA자산운용(구 농협CA투자신탁운용, 이하 CA자산운용) 상임감사가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2005년 자신의 삼촌이 회장으로 있던 회사가 농협에서 수십억원대의 대출을 받는 과정에서 개입,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검찰은 배씨가 이 과정에 부적절한 금품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진정을 접수, 내사를 받기도 했다.<ref name="sndong01">[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9/04/08/200904080500005/200904080500005_1.html 검찰 내사 받는 노무현 전 대통령 사돈 배병렬]</ref>
 
경남 김해시 소재 농협 내외동지점 부지점장을 역임한 김모 씨 주장에 따르면, 배씨는 자신의 삼촌 배OO이 회장으로 일하던 T개발이 부산 남구 용호동에 아파트를 짓는 과정에서 농협 대출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자 대출을 담당한 농협 김해 내외동지점과 심사를 맡은 농협중앙회 등에 압력을 행사해 대출이 가능토록 했다. 당시 T개발은 이 대출건 이외에도 18억원가량을 이미 대출받은 상태였으며 농협 측으로선 대출금이 회수되지 않아 추가대출이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었다.<ref name="sndong01"/> 김 전 부지점장은 당시 대출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배 전 감사를 만났고 압력에 가까운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하였다.<ref name="sndong01"/>
 
{{인용문|대출을 준비하던 2005년 설 직전 배 감사를 직접 만났다. (T개발) 고OO 대표와 (배씨의 삼촌인) 배OO 회장과 함께 배씨 자택을 찾았다. 시가 25만원 상당의 남성 화장품세트를 선물로 가져갔다. 배씨는 내게 ‘T개발 대출건 잘 좀 처리해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면 내가 너한테 맡기겠느냐’고 했다. 대출만 되면 다른 문제는 본인이 해결한다고 했다. 나는 당시 이 대출이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배씨에게 농담반 진담반으로 ‘그러지 말고 박연차 회장에게 부탁해서 처리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20억~30억원이면 해결할 수 있는데요’라고 했다. 나도 그렇고 배씨도 박 회장과 잘 아는 사이다. 그랬더니 배씨는 ‘너는 다른 걱정은 하지 말고 대출에만 신경 써라’고 했다.<ref name="sndong01"/>}}
 
당시 T개발에 대한 대출이 문제가 있었음은 이 대출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농협 인사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당시 대출심사를 맡았던 경남본부 이OO 부본부장(신용대출 부문 책임자)은 [[2009년]] [[4월]] [[신동아]] 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신용등급, 회사의 재무상태, 기존 대출금 미회수 등이 모두 문제였기 때문에 추가대출은 절대 불가능했다. 대출 규모나 성격상 지역본부가 결정할 사안도 아니었다. <ref name="sndong01"/>"고 진술했다.
 
=== 사돈 음주운전 사고 은폐 및 권력개입 의혹 ===
배병렬은 음주운전으로 김해경찰서에 단속되었는데, 배병렬의 음주를 단속한 경찰관에게 인사불이익이 가해져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3년]] [[4월]] 배병렬은 음주운전 후 교통사고를 일으켜 부산 부산진 경찰서 서면지구대 소속 임모(44) 경사 등이 타고 있던 차량과 충돌했다.<ref name="choson20060203"> [http://www.chosun.com/politics/news/200602/200602030008.html 盧대통령 사돈, 음주운전 의심 사고 청와대·경찰 개입 은폐 의혹] 조선일보 2006.02.03</ref> 이 교통사고 피해자인 경찰관 임모씨는 “가해자인 배씨가 음주운전 사고를 냈다”고 주장했고, 당시 사건현장을 목격했던 4명 중 두 명도 “배씨가 술에 취해 있었다”고 증언했다.<ref name="choson20060203"/>
 
사고 당사자인 노 대통령의 사돈 배병렬씨는 “나이가 들어 눈도 침침하고 길도 어둡고 해서 사고는 났지만 술은 전혀 마시지 않았다. 사고 며칠 뒤 합의했으며 별도로 돈을 들고 가 합의를 시도한 일은 없다”고 말했다. 당시 김해경찰서장이었던 양모씨는 “사고가 난 한참 뒤에 임씨가 인사하러 왔기에 한 번 만났을 뿐 진급이나 합의금 얘기는 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ref name="choson20060203"/>
 
이후 그는 교통경찰에 의해 입건되었다.<ref name="chosun20060207">[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602/200602070572.html ‘노대통령 사돈 음주운전’ 의혹제기 경찰 전보 발령] 조선일보 2006년 02월 07일자</ref> 그러나 112 신고를 받고 출동한 진례파출소(현 진례치안센터)는 가해자인 배씨를 파출소로 데리고 갔으나 음주 측정을 하지 않았다. 사건 기록에는 ‘단순 접촉사고’로만 남아 있다. 또 경찰은 목격자들을 불러 “이번 사건에 대해 절대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을 받았고, 그 자리에서 목격자 세 명으로부터 손도장까지 받았다고 당시 목격자 중 두 명이 증언했다. 사건 발생 두 달여 뒤 당시 파출소장 천모씨는 임씨를 불러 직접 합의서를 받았다. 임씨는 “당시 김해경찰서 양모 서장과 서모 정보과장 등 경찰 간부들이 지난해 초까지 나를 불러 진급과 합의금을 제시하며 사건을 숨기려 했다”고 주장했다.<ref name="choson20060203"/>
 
그러나 임 경사는 언론에 이를 발표했고, [[2006년]] [[2월 7일]]부산 부산진경찰서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사돈 배병렬 씨의 음주 교통사고를 은폐하려고 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서면지구대 소속 임모 경사를 6일자로 경찰서 내 생활안전과로 전보 발령했다.<ref name="chosun20060207"/>
 
사고 당시 목격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2003년 4월 24일 오후 7시쯤 술에 취해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던 배씨가 김해시 진례면 신월리 마을길에서 마주 내려 오다 길 옆으로 양보해 있던 피해자 임모씨의 엘란트라 승용차를 들이받았다. 이 사고로 임씨는 전치 5주의 부상을 입고, 자동차 앞 범퍼와 라디에이터 등이 부서지는 피해를 당했다.<ref name="choson20060203"/> 그러나 사고 수습 과정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경찰 간부들이 피해자인 임씨에게 접근해 진급과 합의금을 제시하며 입막음을 시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ref name="choson20060203"/> 그리고 [[2006년]] [[2월]] 임 경사는 전보발령되었다.
 
사건을 은폐하는 과정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직접 나섰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임 경사는 당초 경찰 간부들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2004년 9월 청와대에 민원을 냈다. 임씨는 "[[2004년]] [[11월]]쯤 청와대 민정수석실 오 모 국장이라는 사람이 부산경찰청으로 내려와 나를 불렀다. 그 자리에서 오 모 국장이 '돈을 얼마나 원하느냐. 진급을 시켜주면 되겠느냐. 절대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나를 달랬다.<ref name="choson20060203"/>"고 주장했다. 사고 당사자인 배씨 역시 2004년 12월쯤 임씨를 만나 합의금을 제시하며 회유를 시도했다고 임씨는 주장했다.<ref name="choson20060203"/>
 
부산진경찰서는 "임 경사가 배씨의 음주 교통사고 은폐 의혹을 언론에 제기한 후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라면서 “지구대 근무특성상 민원인들을 자주 접하고 총기를 휴대해야 하는 점 등을 감안, 내근 업무를 보도록 전보 발령했다"고 밝혔다.<ref name="chosun20060207"/> 그러나 이를 두고 인사불이익, 보복성 인사 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ref name="sndong01"/>
 
== 논란 ==
=== 신행정 수도이전 공약 논란 ===
[[2002년]] [[12월 11일]] 당시 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는 이날 인천을 방문해 유세를 하면서 [[충청]]권으로의 수도이전 공약을 내세웠다.
 
{{인용문|이제 앞으로는 서울과 인천 이 지역을 세계업무중심지역으로 얼마나 쾌적한 도시로 만드느냐, 교통 지옥 없는 환경이 깨끗한 도시로 만드느냐가 과제입니다. 수도권에 새로운 사업들이 벌어져야 하는데 그런데 수도권 엄청난 행정규제가 있습니다. 수도권 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입니까. 기능을 분산하는 것입니다. 정치 행정은 충청으로 보내고 여기에는 경제, 금융, 비즈니스 하자는 것입니다. 돈 되는 것은 여기서하고 돈 안되고 시끄럽고 싸우는 것은 충청도로 보냅시다. 아니 충청도 고향 분들 화나겠습니다. 이제 정직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방도 발전해야 합니다. 지방이 발전하지 않으면 지방과 수도권이 앞으로 엄청난 갈등으로 국가가 문제가 됩니다. 지방이 함께 발전하기 위해 수도권을 충청으로 옮기자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ref name="sudo01">[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00281&PAGE_CD= '돈안되는 것 충청도로' 발언 뻥튀기 - 오마이뉴스] 2002년 12월 25일</ref>
}}
 
당시 그의 이같은 발언을 두고 [[대전일보]]는 다음날 1면 머릿기사로 대서특필하면서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노 후보는 이날 인천 유세에서 정치 행정은 충청권으로 분산시키고 경제·금융·비즈니스는 수도권에 남는다"면서 "돈 되는 것은 여기서하고 돈 안되고 시끄럽고 싸움하는 것은 충청권으로 보내자고 말해 청중의 웃음을 샀다"고 보도했다.<ref name="sudo01"/> 그러나 그의 신행정 수도 공약은 그가 [[대통령]]에서 퇴임한 뒤에도 이행할 것을 요구하는 시각이 있어 논란이 진행중에 있다.
 
==== 한미 FTA 추진 ====
{{참고|한미 FTA}}
[[2006년]] [[1월 18일]] 그는 2006년도 대국민 신년연설을 통해 한미 FTA 협상 의지를 발표<ref name="yun060118">[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5268414 한미 FTA 일지]</ref>하였다. [[2월 3일]] 당시 미국시각으로는 2월 2일 그는 [[미국]]으로 간 통상교섭본부장 김종훈을 통해 [[미국]] 의회에서 협상 출범을 선언했다.<ref name="yun060118"/> 이후 노무현이 대통령에 재임 중인 [[2007년]] [[4월 2일]] 한미 FTA가 타결되었다.<ref name="yun060118"/>
 
[[6월 5일]]부터 [[6월 9일]] [[미국]] [[워싱턴]]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1차 협상이 개최되었다.
 
[[2006년]]부터 그는 [[한미 FTA]] 추진을 강행한다. 그러나 [[한미 FTA]]반대운동에 적극 참여하던 [[허세욱 (1953년)|허세욱]]은 결국 협상이 타결 직전에 이르러 가자 [[2007년]] [[4월 1일]] 협상장인 서울 하얏트 호텔 정문 부근에서 분신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 FTA 협상장 앞에서 50대 남성 분신
|url = http://www.ytn.co.kr/_ln/0103_200704011655386172
|출판사 = YTN
|작성일자 = 2007-04-01
|확인일자 = 2011-08-16
}}</ref> 그는 의식이 혼미한 상태로 실려 가면서까지 한미FTA 중단과 노무현 정권 퇴진을 요구하였다.<ref name="민중의소리1">{{뉴스 인용
|제목 = "한미FTA 폐기하라" 50대 노동자 분신
|url = http://www.vop.co.kr/2007/04/01/A00000068291.html
|출판사 = 민중의소리
|작성일자 = 2007-04-01
|확인일자 = 2011-08-20
}}</ref>
 
[[4월 3일]] 민주노동당은 지역위원회별로 모금운동을 시작했다고 언론에 밝혔고, [[4월 4일]] 참여연대 등도 '병원비가 많이 나올 텐데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주자'며 성금 모금 활동이 있었다. 참여연대 게시판 등에도 많은 네티즌들의 격려와 후원이 있었다.<ref name="모금">[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0218883 ''FTA 반대 분신'' 허세욱씨 살리기 각계 모금운동]세계일보 2007-04-04일자</ref> 그러나 그는 사망하면서 모두가 비정규직이니 모금성금은 하지 말아달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ref name="경향1">{{뉴스 인용
|제목 = 故허세욱씨 ‘굴곡의 인생’…의로운 세상 꿈꾸다 ‘배반당한 삶’
|url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4151828471&code=940100
|출판사 = 경향신문
|작성일자 = 2007-04-15
|확인일자 = 2011-08-20
}}</ref> [[2007년]] [[3월 8일]]부터 [[3월 12일]] 한미 FTA 8차 협상이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협상은 1개월만에 체결된다.
 
[[2007년]] [[4월 2일]] [[한미 FTA]]가 최종 타결된다.<ref name="yun060118"/> 그러나 [[6월 16일]] 미국 측에서 노동, 환경 등 7개 분야 수정안 제의하여 [[6월 21일]]부터 [[6월 22일]] FTA 추가협상 1차 협상을 개최하여 [[6월 29일]] 추가협상도 최종타결되었다.<ref name="yun060118"/>
 
한편 분신자살기도로 입원중인 허세욱을 문병왔다가 허세욱으로부터 입당 권유를 받은 경제학자이자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경제비서관 출신[[정태인]](鄭泰仁)은 그의 뜻에 따라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정태인]]은 이후 노무현 정부와 결별했고, 더불어 그의 30년 친구인 [[유시민]] 등과도 결별을 선언하기도 했다.<ref name="결별1">{{뉴스 인용
|제목 = "유시민과 난 항상 신분격차 있었다" - 30년 친구와 결별하고 '새 동지' 선택
|url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27562
|출판사 = 오마이뉴스
|작성일자 = 2007-08-10
|확인일자 = 2011-08-16
}}</ref> [[2008년]] [[진보신당]] 창당 이후 정태인은 [[진보신당]]에 입당하였다.<ref name="결별1"/>
 
=== 남상국 실명 언급 논란 ===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둘째 형 [[노건평]]이 [[대우건설]] 사장 [[남상국]]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과 관련, 언론에 출연하여 [[남상국]]의 실명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에 대한 비판과 논란이 있다. 노무현의 남상국 비난 발언은 언론을 통해 공식 보도되었다. 이 사건 직후 남상국은 한강 다리에서 투신, 13일만에 시신이 발견되었다.
 
=== 김구에 대한 관점 논란 ===
[[2003년]] [[6월]] [[일본]] 순방 중, [[6월 8일]] [[도쿄]]에서 가진 공개 인터뷰에서 "[[김구]]는 실패한 정치인" 이라고 평가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ref name="omai03">[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27583 노무현 대통령, 김구 평가 발언 논란 - 오마이뉴스] 2003년 06월 11일자</ref> 그는 도쿄방송(TBS)이 일본 전역에 방영한 '한국 노무현 대통령 솔직하게 직접 대화'라는 주제의 90분짜리 토론에 참석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일본 여성 방청객의 질문에 "과거에는 김구 선생이었으나 정치적으로 성공을 못해 그 뒤 링컨으로 바꿨다"고 밝혔다.<ref name="omai03"/>
 
김구를 실패한 정치인으로 규정한 것을 놓고 국내에서는 논란이 벌어졌다. 광주의 도청이전반대추진위원회 관계자는 "평생을 항일독립운동으로 민족의 재단 앞에 부끄럼없이 살아온 분을 일국의 대통령이 침략자였던 일본 국민들 앞에서 실패한 정치인으로 평가한 것은 적절하지 못했다"며 "그렇다면 항일독립운동이 실패한 정치활동이란 말이냐"고 분개했다.<ref name="omai03"/>
 
청와대 게시판에서도 노 대통령의 방일 발언을 놓고 갑론을박이 치열하다. '백범 김구선생을 욕보인 등신'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네티즌은 "백범이 살아서 일본에게 갖은 욕을 다 보시더니 돌아가셔도 일본에서 웃음꺼리가 되셨구나"라며 "의도하지 않았든 돌발적이든 일본놈들 앞에서 백범선생을 실패했다고 하는 저의가 뭐냐"고 분노했다. 또 다른 네티즌은 "일본이 과거 식민주의 제국주의 때와 무엇이 다른 것인가, 일본 제국주의의 그 만행을 한국이 하겠다는 것인가"라며 "김구 선생과 같은 진정한 민족의 지도자가 없는 한국의 현실이 암울하다"고 말했다.<ref name="omai03"/>
 
[[김근태]]는 그가 외교 문제에서 실패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외교에 있어서도 실패하고 있다. 중국 가서 하는 이야기, 일본 가서 하는 이야기가 다르다. 국민의 자부심을 상처낸다. 한미 정상회담까지는 분명하게 지적하고 비판했지만 한일정상회담은 너무 기가 막혀서 얘기를 하지 않았다. 과거사를 진정으로 반성하고 있지 않은 일본 천황과 건배하는 것이나 일본 국민들과의 대화에서 '김구 선생이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철학과 원칙은 함께 하지만 판단이 다를 수 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34415 "대선자금공개 이회창씨에게 달려있다" - 오마이뉴스] 2003년 07월 19일자</ref>"는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의 발언을 지지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정치인 김구선생이 바르게 평가되야'라는 글을 게시한 네티즌은 "외세의 힘에 의해 우리 국민은 공산주의가 아니면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해야하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데 백범 김구선생의 중립적인 민족주의 국가는 어디에 세워야하고 국민은 어떻게 김구를 선택하고 어떻게 따라야했던가"라며 정치 지도자로서 김구 선생은 재평가 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네티즌은 "결국 김구는 훌륭한 인격자이자 지도자이지만 남에도 북에도 설자리가 없었던 비운의 지도자였고 우리 국민은 훌륭한 지도자 김구를 두고 북에서는 공산주의를 따라갔고 남에서는 자유민주주의를 따라갔다"며 어쩔 수 없는 현실의 비극을 강조했다.<ref name="omai03"/> [[성균관대]] 교수 [[김삼웅]]은 "일왕이나 수상과 공식적으로 말한 것도 아니고 애국심은 존경하지만 정치인으로서 실패했다는 발언 하나 가지고 왈가불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하고 더 이상의 코멘트는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다.<ref name="omai03"/> 그러나 발언의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비판거리의 하나로 활용되었다.
 
=== 다케시마 발언 논란 ===
[[2004년]] [[7월]] 한일 정상회담 당시 [[독도]]를 [[일본]]이 자국 영토라며 부르는 호칭인 [[다케시마]]라고 발언하여 논란이 되었다.
 
[[7월 21일]] 한.일정상회담 후 가진 공동기자회견 과정에 '독도'를 무심결에 일본인들이 독도를 자국영토라고 주장하며 부르는 '다케시마(竹島)'라는 표현을 써 파문이 일고 있다. 일본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 나온 '실수'이나, 일본언론들이 이를 "한국대통령이 일본의 견해를 용인?"했다는 식의 보도를 하고 있고 야당도 이를 문제삼고 나와<ref name="pre01">[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40722095514&section=01 盧대통령 "다케시마" 실언 논란] 프레시안 2004년 07월 22일자</ref> 논란이 되었다.
[[7월 21일]] 저녁 [[제주도]]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후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일본 아사히 신문 기자가 "역사인식 문제, 야스쿠니 문제, 다케시마 문제 등에 대한 지금 현 시점의 인식 그리고 이런 장벽을 어떻게 메워나갈 것인지 그것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다"는 질문에 "다케시마 문제에 관해서는 좀 적당하게 얘기하고 넘어가겠다"면서 "독도문제에 관해서는 우리 한국 정부의 입장은 분명하다. 이런 자리에서 재론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재론하지 않겠다 이런 정도로 말씀을 드리겠다"고 답했다.<ref name="pre01"/>
노무현의 [[다케시마]] 발언은 곧 [[일본]] 언론들에게도 보도되었다. [[일본]] 지지(時事)통신은 이와 관련, 22일 새벽 2시1분 <공식회견에서 '다케시마'라고 발언=영토문제, 무심결의 실수?-한국대통령>이라는 제목의 제주도발 기사를 통해 이같은 발언을 주요뉴스로 다뤘다.<ref name="pre01"/> 지지통신은 "일본과 한국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영토문제에서 한국대통령이 일본의 견해를 용인?ㅡ"이라고 쓴 뒤 "노무현대통령은 21일 일-한 정상회담후 가진 공동기자회견에서 다케시마(한국명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불렀다"고 보도했다. 지지통신은 "영토와 역사문제에 대한 견해를 묻는 일본인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 무심코 발언한 것으로 보이나, 눈살을 찌푸리는 한국인 기자도 있었다"고 비꼬았다.<ref name="pre01"/> 그의 다케시마 발언을 일본 극우 인사일각에서는 한국에서 다케시마로 인정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 비판과 논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