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10·1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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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1946년 10월 메이데이 행사.jpg|thumb|right|200px|사건 직전인 [[1946년]] [[10월 1일]] 낮에 개최된 메이데이 행사]]
'''대구 10·1 사건'''(大邱 10·1 事件)은 [[1946년]] [[10월 1일]]에 [[미군정]] 영역인 [[대구광역시|대구]] 지역에서 시작된 대규모 시위, 유혈
|url=http://www.knun.net/news/article.html?no=5442
|제목=10월, 역사 뒤의 숨은 진실을 재조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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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2명이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노동자들이 시내에 집결하기 시작했고 굶주린 일반 시민들과 학생들도 시위에 합세했다. 만여명의 군중에 포위된 대구경찰서장은 스스로 무장해제를 선언하고 유치장 열쇠를 건네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들을 석방하게 했다. [[조선공산당]] 지도부의 통제를 받는 노동자들은 질서 있게 경찰권을 인수하려 했다. 그런데 이때, 거리 한쪽에서 흥분한 군중들이 경찰에 투석을 시작했고, 궁지에 몰린 경찰관들도 자위권을 발동해 순식간에 17명의 시위대를 사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ref>박헌영 평전, 안재성 지음. p380</ref>
분노한 군중들은 폭도로 변했다. 군중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동향을 살피던 정사복 경찰관들을 구타하거나 경찰 무기고를 털어 총기로 무장했다. 처음에 평화시위로 시작하다가
[[미군정]]은 이튿날인 [[10월 2일]]에 [[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을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했다. 그러나 [[미군]] 개입으로 시위가 대구 인근인 [[경산군]], [[성주군]], [[영천군]] 등으로 확대되면서 [[경상북도]] 일대에서 [[민중]]들과 [[미군정]]간의 충돌은 멈추지 않고, 계속 발생하게 되었다. 이후 경북 지역 민중시위 진압 과정에서 또다시 경북 지역을 벗어나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1946년]] 말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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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가담자 일부는 이웃 달성(達城)으로 달려가 그곳 [[경찰서]]를 습격하고 [[군청]]을 불사르는 등의 시위를 일으켰으며, 이 사건으로 [[경찰관]] 여러 명이 살해되었고, [[달성군]] 군수 등 여러 명이 불에 타 죽었다.
대구 10.1 사건은 [[조선공산당]]의 지도와 영향 아래 발생하였지만, 지역별로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 미리 통일적으로 준비되거나 철저히 계획된 사건은 아니었다.<ref>당시 경북, 대구 일대 지역의 전염병 확산과 미군정의 쌀배급 정책 실패, 미군 경찰과 반공청년단의 '좌익 사냥'(대구, 경북지역은 '조선의 모스크바'라 불릴만큼 공산주의 활동이 왕성한 곳이었다.), 미군정의 친일파 등용 등으로 불만에 쌓인 민중들의 불만요소로 터진것이 컸다.</ref> 이미 [[박헌영]]<ref>이 시기 박헌영은 9월총파업 발생 이전부터 월북한 상태였다.</ref>, [[이강국]], [[이주하]] 등 간부들에 대한 검거령이 내려져 일부는 월북하고 일부는 체포되었으므로, 조선공산당의 영향력은 전국 단위의 조직적인 봉기를 일으킬 수 있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
시위대는 [[미군정]]의 경제 정책에 대한 반발과 경찰과 같은 핵심 행정기구에 [[친일파]]를 그대로 등용한 과거사 미청산에 대한 반대, 행정과 치안에 인민이 참여하는 [[인민위원회]] 설치 요구 등의 주장을 내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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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대의 평가 ==
[[박헌영]]은 이 사건을 "'10월 인민항쟁'으로 부르며, '[[동학농민운동]] , [[3.1 운동]]과 함께 조선의 3대 위대한 인민항쟁'이라 평가했다. 실제로 [[조선공산당]]은 공식적으로 시위를 선동한 적이 없지만, 지역의 공산당원들은 읍면마다 자생적으로 터진
한편, 우익세력들은 일제히 이 사건을 격렬히 비판했는데, 특히 [[한국민주당]]세력에서는 '이번 파업투쟁은 박헌영 일파의 모략 선동에 기인한 것'이라며 일제히 맹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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