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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
 
리처드는 포서링게이파서링게이 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3대 요크 공작, 리처드 플랜테저넷([[헨리 6세]]의 왕좌에 대한 강력한 요구자였다.)과 세실리 네빌의 여덟째 자식이자 막내였고, 살아남은 아들 중에는 넷째였다. 리처드는 그의 사촌 16대 워윅 백작, 리처드 네빌([[장미 전쟁]]에서의 역할로 인해 훗날 "킹 메이커"라 불렸다.)의 지도하에 웬즐리데일의 미들햄 성에서 그의 삶에 영향력이 큰 몇해를 보냈다. 리처드는 워윅 백작의 영지에 있으면서 프렌시스 로벨과 깊은 우정을 발전시켰고, 그 우정은 그의 삶 내내 강력하게 유지되었다. 그 집안에는 다른 아이가 있었는데 훗날 리처드와 결혼을 하게 될, 워윅 백작의 딸 [[앤 네빌]]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형 에드먼드가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사망하자, 여덟 살이었던 리처드는 그의 어머니 요크 공작부인에 의해 [[저지대 국가]]로 보내졌다. 그 곳은 복수심에 불타는 헨리 6세의 왕비, 앙주의 마가렛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었다. 그들은 타운턴 전투에서 [[랭카스터 가]]가 패배하자 잉글랜드로 돌아와 리처드의 큰 형이 [[에드워드 4세]]로 즉위하게 되는 대관식에 참석했다. 이 시기에, 리처드는 가터 기사단과 바스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을 뿐 아니라 글로세스터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그런 후 리처드는 기사 훈련을 위해 미들햄의 워윅 백작령으로 보내졌다. 약간의 방해가 있어, 리처드는 12살이 된 1465년 초까지 미들햄에 머물렀다.
 
리처드는 어린 나이에 [[장미 전쟁]]츼 거친 정치판에 말려들게 되었다.에드워드는 11세의 그에게 직책을 주었고, 17세까지 그는 독립적인 지휘권을 갖고 있었다.
Richard became involved in the rough politics of the Wars of the Roses at an early age. Edward appointed him the sole Commissioner of Array for the Western Counties in 1464, when he was 11. By the age of 17, he had an independent command.[3]
 
At a second time in his youth Richard was forced to seek refuge in the Low Countries which were part of the realm of the Duchy of Burgundy. His sister Margaret had become the wife of Charles the Bold, Duke of Burgundy in 1468. Richard along with his brother, the King, fled to Burgundy in October 1470 after Warwick defected to the side of Margaret of Anjou. Only 18 years old, Richard played crucial roles in two battles which resulted in Edward's restoration to the throne in spring 1471 – Barnet and Tewkesbury.[4] {{틀:요크 왕가}}
어린 시절에 두 차례나 리처드는 도피를 위해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였던 [[저지대 국가]]로 피신해야만 했다. 그의 누이 마가렛은 1468년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의 부인이 되었다. 워윅 백작이 앙주의 마가렛 측으로 붙은 이후, 1470년 10월에 리처드는 왕이었던 그의 형을 따라 부르고뉴로 달아났다. 단지 18세에 불과했던 리처드는 1471년 봄 에드워드를 왕좌로 복귀할 수 있도록 만든 두 번의 전투(바넷 전투와 튜크스버리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틀:요크 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