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회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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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제1차 세계대전세계 대전]]으로 세계와 [[동아시아]]의 정세가 크게 달라졌다. [[제정 러시아]]가 무너졌고, 독일은 패전국이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도 국력이 크게 약화된 반면에 [[미국]]이 세계의 지도적인 국가로 급부상했다. 일본은 전쟁기간 중에 중국에서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했으나 중국 내 반일여론의 광범위한 확산, 친일적인 [[안휘파]] 군벌의 쇠퇴, [[제1차 세계대전세계 대전]]으로 입은 상처로부터후유증으로부터 회복되기 시작한 유럽열강의 재진출 등으로 인해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시작된 미국과 일본 사이의 '군함건조 경쟁'으로 인해 두 나라는 재정압박을 받게 되었다. [[미국]]은 [[1916년]]의 해군법령에 따라 [[1919년]] 7월까지 156척의 군함을 건조하기로 했고, 이에 대항해 일본도 '88함대'의 건설에 주력했다. 두 나라는 과다한 군사비 지출을 감당하기 어려워 군비제한을 위한 국제회의를 열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1921년]] 8월, 미국의 대통령 [[워렌 하딩]]은 일본, 중국 및 동아시아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포르투갈에 '군비제한을 위한 회의를 열자'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이들 9개국이 참여한 가운데 국제회의가 열렸으니, 이것이 곧 '''워싱턴 회의'''이다.
 
==회의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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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특권이나 특별이익을 배제하는 것
 
<ref>그러나 열강이 이미 중국으로부터 얻은 기득권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고, 또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 발생할 경우의 제재수단에 대한 규정도 없었기 때문에 따라서 이 조약에서 실질적인 의미가 없었다. 다만 이 조약의 성립으로 그동안 [[미국]]과 일본 사이에 해석상 의견차이가 있었던 [[랜싱-이시이 각서]]는 [[1923년]] 4월에 폐지되었다.</ref>
 
*;태평양 방면의 솜인 속지(insular possessions)와 섬인 영지(insular dominions)에 관한 4개국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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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쇠표=예
}} p69~p74
 
==주석==
<references/>
 
[[분류:19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