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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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3세기의 위기|디오클레티아누스|사두 정치 체제}}
 
[[3세기의 위기]]는 235년에서 284년까지의 로마 제국의 붕괴와 쇠퇴 현상을 일컫는다. 이 기간 동안 로마 제국내에서 25명의 군사 황제가 난립했고, 제국은 군사, 정치, 경제 분야에서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시대는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년 ~ 305년)의 집권과 함께 막을 내렸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고, 이는 결국 고대 서양 세계의 붕괴를 유발하게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거대한 제국을 한번에 통치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285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막시미아누스]]를 부제(Caesar)로 삼았다가 이듬해 바로 정제(Augustus) 승격시킨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 동방의 문제를 관할하는 동안 막시미아누스는 제국 서방을 책임지는 형태였다. 293년 두 명의 정제 외에 두 명의 부제를 더 두어 사두정치 체제를 이루었는데, 이러한 정치적인 체제를 [[테트라키]] (사두정치 체제.Tetrarchia)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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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비아누스가 죽자,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정제로 추대되었고, 가까운 친척<!--(동생이라고도 한다.)-->인 [[발렌스]]가 그를 도와 공동 황제가 되었다. 365년 장군 [[프로코피우스]]는 이에 불복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367년 발렌스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367년]] 8살의 [[그라티아누스]]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명으로 제국 서부의 공동 황제에 추대되었다. 374년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게르만 족]]에 대해 군사적인 압박을 가하다 죽었다. 16세의 그라티아누스는 단독으로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군대는 그의 어린 이복 동생인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서부 로마의 공동 황제로 즉위시켰고, 그라티아누스는 이에 복종했다<!--([[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사 이야기]]에는 [[그라티아누스]]가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서부 로마의 공동 황제로 즉위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제국의 골치거리는 [[훈족[흉노족]]의 침입이었다. 훈족은훈족[흉노족]은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을 압박해왔고 376년 동고트족의 에르마나리크왕은 훈족의훈족[흉노족]의 [[아틸라]]와 맞서 싸우다가 죽었다. 서고트족의 족장 [[아타나리크]]는 훈족에훈족[흉노족]에 쫓겨 발렌스에게 [[트라키아]]로 이주해 달라고 청원하였고 발렌스는 이를 수락하였다. 그러나 트라키아의 총독인 [[루피키누스]]는 황제의 명령을 거절하고 서고트족을 탄압하였고 이에 반기를 든 서고트족과의 전투에서 패했다. 서고트족과 모든 트라키아의 고트족, 여기에 훈족까지훈족[흉노족]까지 가세하여 로마를 압박하자 로마는 전면전에 돌입했다.
 
378년 봄 [[발렌스]]는 서방황제 [[그라티아누스]]가 증원군을 보낸다고 하자 이를 믿고 발칸 반도로 진군하였다. 발렌스는 초기에 아드리아노폴리스 근처의 마리차 강변에서 상당한 규모의 [[고트족]] 군대를 물리치고 진군했으나 서방에서의 지원군의 도착이 늦어졌다. 서방황제 그라티아누스는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대규모 전투를 하지 말라고 요청했으나 [[발렌스]]는 적을 과소 평가하고 공격주장을 받아들여 고트족과 전면전을 벌였다. 378년 8월 9일 벌어진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는 로마군의 완패로 끝났다. 이 격렬한 전투에서 발렌스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고 <!--''로마 제국 최후의 역사가''라 불리는 군인출신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이 전투에서 로마군의 3분의 2가 괴멸했다고 추정하였다. 이 전투의 패배로 노련한 병사들과 관료들이 죽었고, 제국의 통치력에 상당한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라티아누스]]는 동부의 황제로 379년 [[테오도시우스 1세]]를 지명했다.